해외 50개국 수출… 국내 진료봉사단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동형 진료장비

장현양 회장<사진>은 1982년 4월1일에 처음 치과업계에 들어왔다. 지씨코리아의 전신인 대성치재에서 첫발을 내딛었다.

“대성통상에서 열심히 배우고 일했습니다.”

그 당시 강남의 4개구를 담당하면서 120개의 치과를 직접 발품을 팔아 다니면서 고객인 원장들을 일일이 만나 영업노하우를 기록한 것이 대학노트 3권에 달한다. 치과에서 근무하는 보조 인력에 관한 것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고객관리 노하우로 원장님들의 손과 발이 되어 200여개 넘는 치과의 개원을 도와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참 잘 나가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미소를 띠며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던 1988년 9월18일자로 장 회장의 이름을 건 대양종합상사를 설립했다.

당시는 경기가 좋아 먹고 살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장 회장은 1988년부터 난지도에서 치과의료선교회와 함께 봉사를 시작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태국이나 미얀마 등의 난민부터 치과의사 9명과 위생사들 처음에는 17명이 팀을 꾸려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 전기도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 발전기를 돌려서 진료했던 시절, 콤프레샤를 작동시키고 썩션이나 아말감 메타 등 전기를 발전기로 대신하여야 했다.

그런데 콤프레샤가 스톱이 되고, 전기가 과부화되어 모든 장비까지 멈춘 상황에 이르렀다. 가져간 의료장비들을 진료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다시 가져와야만 하는 상황에 바로 장 회장은 기지를 발휘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상용 기기들을 챙겨갔던 것이다. 그것들을 이용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기기들을 분해하고 조립하여 장비를 모두 수리해 아침에 함께 간 원장님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장 회장 덕분에 그 다음날 무사히 진료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해외진료봉사에서 장 회장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그렇게 다녔던 세월이 벌써 25년이 됐다. 한해도 걸러지 않고 일 년에 4~5차례 70개국 이상을 방문하며 봉사활동을 다녔다.

아프가니스탄, 예맨 등 치과의료선교회의선교사가 파견된 세계19개국 곳곳에도 방문하여 유니트 체어부터 전기와 상하수도 설비콤프레샤 등을 제대로 작동시켜 진료할 수 있도록 도와준 숨은 봉사자가 바로 장 회장이다. 치과의료선교회 실행이사로 10년 이상을 봉사해 왔다.

그러한 실제 해외에서의 진료봉사경험을 그대로 담은 장비가 지금 대양덴텍에서 판매하고 이동형 진료장비이다.

치과의료선교회 멤버가 700명 정도 된다. 그 분들이 진료 갈 때마다 함께 가니, 장 회장은 일 년에도 여러차례 함께 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파키스탄 현지인 중 한국 사람만큼 성격이 급한 현지인을 통해 현지도착하면 5분 내로 장비를 설치하고 구강검진부터하게 되는 아이디어가 생겼다. 그러한 여러 가지의 현장의 경험을 오롯이 묻어나는 것이 현재의 진료형 이동장비들이다. 이 장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장 회장이 직접 제조했다.

현재는 50개국에 수술 중에 있고, 어느 지역에도 잘 맞는 장비로 탈바꿈 됐다.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스웨덴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동형 진료장비는 빛을 발하고 있다.

또한 치과촉탁의제도나 고령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장비가 됐다. 이동형장비하나면 체어에 눕혀 응급진료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진료까지 가능하다. 스마일재단이나 전국 보건소 그리고 치위생과가 있는 대학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11개 치과대학 봉사 활동하는 동아리에서도 대양덴텍의 이동형 진료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장 회장의 25년 봉사의 노하우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장 회장이 치과계에 몸을 담은 지 벌써 35년이 지났다. 요즘은 먹고사는 것이 보장받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아까운 젊은 친구들이 꿈을 펼칠 수 없고 비전이 보이지 않아 떠나게 되는 경우를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고 했다.

지금은 보험급여화시대로 치과에서 긴축경영을 하게 되고, 가장 먼저 재료비를 절감하려한다. 또한 제품들의 가격이 이미 인터넷상에서 공개되어 있어, 소매가격자체가 파격화되어 힘든 게 현실이다. 심지어는 도매가격 이하로도 판매되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도 인터넷 쇼핑몰이 발달하면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 회장은 국내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제조가 바람직하다고 해답을 내놓았다.

장 회장은 2003년부터 독일 IDS 전시를 다니면서, 기공용 톱날하나만 가지고 꾸준히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톱날하나로 세계를 재패하는 모습을 보았다. 독일의 카보나 시로나에 한국의 제품이 많이 판매될 만큼 이제 우리 한국의 제조 수준은 가히 높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제조라고 딱 잘라 말한다. 또한 해외시장에 답이 있다고 한다.

한국시장보다 200배 많은 먹을거리가 있다며 해외로 눈을 돌리라고 조언한다. 하루라도 먼저 깃발을 꽂아야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해외로 눈을 돌린 사람들이 성공했으며 제조해서 수출했던 업체들이 성공했다.

안일하게 생각하면 자연 도태되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세상을 넓게 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지난 3월 제조업협의회 회장이 됐다. 2019년까지 그의 임기기간동안 한국 제조업의 육성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며 임원들 모두 수출의 일선에서 뒤는 역군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조업협의회는 내년 3월 독일 IDS 전시에 참가하기 전까지 자주 모여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고 소통할 예정이다. 그것이 한국치재업계가 나가야 할 방향이자 제조업협의회의 나침반이자 등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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