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강우규의거
3. 의친왕과 최준
4. 신한혁명당 사건(보안법 위반 사건)
5. 고려국 건설계획과 3.1운동
6. 의친왕 망명 미수사건(朝鮮民族大同團 사건)
7. 결론


Ⅰ. 서론

함석태는 치과의사면허 1호로 알려져 있는데, 강우규의 손녀인 강영재를 맡아 키워 이화여전을 졸업시켰다. 1930~40년 대표적인 한국인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함석태는 ‘小物珍品大王’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당시 주요한 고미술품 수집가인 장택상, 윤치영, 한상억, 이한복, 박병래, 이태준 등과 교유하였다.

일제시기 말인 1944년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수장품을 모두 차에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였다가 월남에 실패한 함석태의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아마도 황해도 해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가족들과 고미술품을 함께 가져오려다 실패한 듯하다.
함석태의 부친인 함영택은 박은식, 안창호, 윤치호, 조만식, 오세창, 이승훈 등과 친교가 있었다.

여기에서는 강우규 의거의 배후조직에 대하여 알아보고 함영택와 함석태의 존황의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II.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거

지린성 라오허현 신흥동에 거주하는 강우규는 1919년 3월 26일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에서 박은식, 이발과 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라오허현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강우 의거와 이발자결사건을 유발하였다.

1919년 5월3일 강우규는 노인동맹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할 계획을 품고 훈춘에서 최진동이 건네 준 폭탄을 가지고 허형과 같이 원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허형으로부터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사진과 부임정보를 입수하였다.

강우규는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경주의 최 준에게 보내는 공한을 허형에게 건네준 후 남대문 정거장에 나가 사이토 마코토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조선민족대동단5,6)과 강우규 의거 관련자들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강우규는 군중 속을 빠져나와 한기동의 도움으로 박영호, 김종호, 장익규이 집을 전전하다가 9월 16일 사직동 임승화의 집에서 애매한 젊은이들을 고생시킬 수 없다고 한인 순사 김태석에게 자수하였다. 1920년 12월 29일 강우규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함석태와 강영재                       ▲ 함석태치과의원

1. 함석태

강영재는 강우규의 장남인 강건하의 딸이다.
강건하는 강우규의 옥바라지로 가산을 탕진하였으며, 요시찰인으로 일제의 감시아래 살았다. 강건하는 고향 친지인 함석태에게 강영재의 양육을 부탁하고 작고하였다. 강우규의 고향은 평안남도 덕천군이고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군이었다.

함석태는 강우규의 손녀인 강영재를 맡아 키워 이화여전을 졸업시켰다. 함석태는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치과의사면허 1호로 서울에서 함석태 치과의원을 개업하였으며,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순종황제와 윤황후도 함석태의 치과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1932년 7월12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함석태가 안창호의 치과치료를 위하여 경찰서 유치장으로 출장 진료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함석태는 김약수, 조만식등도 치료하였다. 광화문 네거리 동북부에 있는 비각의 원명칭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 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각(大韓帝國大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閣)이다.

이 철제문을 함석태가 보관하였다. 일본인들이 길을 넓히느라 뜯어서 경매할 때 이태준의 글에는 “함석태선생이 경매로 낙찰 받은 것이다. 진고개 부호가 거액으로 사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고 굳게 보관해온 것이다.”라고 나온다. 함석태는 후에 이것을 고종황제께 바쳤다.

함석태의 부친 함영택은 성균관 진사와 의관을 지냈다고 전하나 ‘조선문과방목’에서 함영택은 찾을 수 없다. 함영택은 박은식, 안창호, 윤치호, 조만식, 오세창, 이승훈 등과 친교가 있었다.
치과임상 편집 팀과의 인터뷰에서 함석태의 손자 함각은 “가세는 어느 정도 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대단한 부호였음에 틀림없다. 소작을 주는 전토도 많아서 고향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증조부 함영택 진사는 재산이 많은 만큼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는 등 소위‘사회사업’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조부 함석태 선생이 일본에 유학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21년 11월 20일 동아일보 “평안 양도 참의장의 기사에 콴덴현에 근거를 둔 체포된 대한 청년단원은 함영택에게서 군자금 100여원을 받았다고 진술하였으나, 함영택이 함구하여 증거불충분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2년 10월 29일 동아일보 ‘영변중학 기성’의 기사에는 영변중학 기성 발기인 명단에 함영택이 있다. 1923년 2월20일 동아일보 ‘백 사십여군에서’의 기사에는 민립대학 발기인 명단에 함영택이 있다.

1924년 1월 14일 동아일보 2면 ‘독립단 부친에게’의 기사에는 함영택이 군자모집원이라는 강도에게 오십원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6년 11월 14일 동아일보 4면 ‘영변 산업조합 창립 준비회 개최’기사에는 감사에 함영택이 있다.

1926년 12월 10일 동아일보 ‘승격운동 맹렬’기사에는 영변 공립농업학교의 학년 연장 승격운동으로 대표자 함영택 등이 평안북도 당국에 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8년 11월 10일 동아일보 4면 “영변 공농교 승격운동 맹렬”기사에는 함영택이 1천원을 자발적으로 희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III. 의친왕(義親王)과 최준(崔浚)

의친왕과 영친왕)은 경주에 가면 최준의 집을 방문하여 바둑을 두고 최부자 가문의 음식을 즐겼다. 영친왕이 1907년 12월 일본에 인질로 갔으므로 이 이야기에서 의친왕은1907년 12월 이전부터 최준과 교류한 것을 알 수 있다.

고종황제가 의병거사를 위해 의친왕과 영친왕을 최준에게 보낸 것이다. 의친왕은 청송의 심부자의 송소고택도 방문한 기록이 보이는 데 이러한 이야기도 구한말 의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의친왕은 경상도 거창의병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1909년 10월경 다시 최준을 만났다. 정태균과 최준은 사돈관계를 맺었다. 최준은 안희제, 손병희, 최익현, 신돌석, 김성수, 정인보,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등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은 최준의 사촌 자형이다.

대한광복단은 1918년 조직이 일제에 노출될 때까지 4년간 국내외에서 활동한 가장 큰 비밀결사단체였다. 최준은 자형에게도 아낌없이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8년 최준은 백산상회를 세웠다. 군자금을 지원하려면 논밭을 팔아서 돈을 만주로 자유롭게 반출할 수 있는 무역회사가 적격이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최준은 전답을 담보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 자금을 수출입용으로 위장하여 안희제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다. 10년만에 부채가 당시 130만 엔에 달했다. 최준은 백산무역 설립 이후 한동안 대출과 상환을 제대로 해 은행의 환심을 산 뒤 본격적으로 거액의 대출을 받아나갔다. 조선 제일의 부자였기에 은행도 의심하지 않았다. 최준은 의친왕이 망명을 시도했던 대동단 사건에도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8년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고 최준이 주도한 백산무역이 파산 위기를 맞았다. 최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의친왕은 식산은행 총재이던 아리가 미츠도요를 시켜 총독부를 설득하였다. 식산은행 총재 아리가 미츠도요는 사이토 마코토총독의 심복이었다.

“최씨 집안 하나가 망하는 거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이 일로 총독부가 욕을 먹고 국민 총화에 금이 갈까 걱정됩니다. 다른 지주들 같으면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더 많이 부과하여 부채를 금방 갚겠지만, 그 집에서는 올해에도 흉년이 들자 관에서 못하는 기아자 구휼에 많은 재산을 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최준의 논밭이나 집 등 부동산 문서는 물론이고 가구나 집기에도 몽땅 딱지가 붙은 지 열흘 후 식산은행의 아리가 미츠도요로부터 즉시 그에게 찾아오라는 통지가 왔다. 아리가 미츠도요는 일본 귀족출신 실력가로 경제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한편 문화적 소양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 각하의 뜻에 따라 우리 은행에 진 최 선생의 부채가 모두 80만 엔 중 40만 엔을 탕감해 주겠습니다. 나머지 40만 엔은 천천히 갚도록 하십시오.” 일본 육군성은 사이토 마코토총독에게 경고를 보냈지만, 이것으로 최준의 부채는 일단락되었다.

총독부는 총칼통치를 강행해서는 한국 민심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 문화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민중들의 경을 받던 최부자를 파산시켜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상환유예를 결정하였다. 이때 의친왕은 사랑채에 엿새를 머물며 최준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IV. 신한혁명당 사건(보안법 위반 사건)
 

1915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이상설은 상하이의 신규식, 박은식, 베이징의 유동열1), 성낙형, 이춘일, 유홍열2), 김규흥등과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본부장 이상설과 교통부장 유동열은 베이징 서단패루 93호 김자순3)의 집에 본부를 차리고, 조성환)4)을 만주지방의 조직강화를 위해 서간도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고종황제와 의친왕을 망명시키려는 계획으로 외교부장 성낙형을 고종황제로부터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체결에 필요한 신임장을 받아오기 위해서 국내에 잠입시켰으나, 성낙형이 검거되어 실패하였다.5) 일제는 조성환의 활동영역으로 칭다오를 지목하였는데 조성환은 베이징을 근거지로 삼고 남으로는 상하이, 동으로 연해주에 걸쳐 움직이면서 독일의 핵심 근거지인 산뚱반도에서 활동하였다. 6)중한의방조약은 중국 원수, 대한국망명정부 원수, 독일황제가 1915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독일정부의 보증하에 중국정부와 신한혁명당이 대한국망명정부 사이에 사전군사동맹을 체결해 독립전쟁에 대비한다. 한민족이 독립전쟁을 감행하면 중국정부는 즉시 군대와 무기를 후원하며, 중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국 독립군은 중국을 도와서 일제의 안봉철도7)를 파괴하고 한중공동의 항일전선을 구축한다. 대한국은 광복한 후 30년간 중국의 원조에 대한 배상을 실시할 것이며, 중국이 배상을 구실로 대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한다.
 
 중한의방조약은 사후적인 문제까지도 주도면밀하게 명기해 놓았으며, 독립전쟁 기간에 중국 측에서 군관을 파견해 주는 문제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약의 체결을 위해서는 중국 원수와 대한국 망명정부 원수 및 독일 황제의 인준까지 거치도록 하고 대한국이 광복될 때까지는 서로가 비밀을 지킬 것을 명시하였다. 이 사건이 1915년 일제에 의해 비밀리에 붙여졌던 ‘보안법 위반 사건’인데 이상설이 주도한 고종황제와 의친왕의 망명계획이었다.

 당시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28일부터 1918년 11월11일까지 진행되었는데, 독일황제와 중국 원수8)가 신한혁명당을 매체로 대한국 망명정부와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의친왕의 망명을 후원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당시, 중국과 독일은 대한제국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 된다. 신한혁명당은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안봉선 철도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황제로부터 위임을 받아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이라는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구상은 중국의 위안스카이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모두 수락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구상도 성낙형이 1915년 7월 서울에 들어와 변석붕 등과 함께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을 방법을 협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성낙형은 변석붕) 집에서 앞서 밝힌 동지에게, 재 중국 불평조선인의 운동방침으로서 중국은 위안스카이가 제위에 오르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다만 그 발표 일을 조정할 뿐이다. 또 독일은 황제에 의해 지배받는 나라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1914)은 결국 독일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선동에 편승할 이유가 없으며 독일에게 개전하고 한편으로는 중국을 향하여 무법 요구를 하여 중국 상하의 원한을 샀기에 풀려고 할 것이다.

이 형세라면 제1차 세계대전(1914) 종국 후 일본은 동양에서 고립되어 점점 퇴세(頹勢)를 나타내어 중국, 독일의 연합군대와 대전할 수밖에 없는 곤경에 빠질 것이다. 조선의 독립회복은 지금부터 중국 및 독일과의 조약을 통하여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나, 두 나라는 군주정치로서 종래와 같이 조선이 공화정치를 주장한다면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를 명분으로 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씨 왕가의 1인을 이 운동의 맹주로 결정하였다는 뜻을 알렸다. 변석붕, 심인택, 정일영등은 이왕은 어리석지 않고 왕세자는 일본에 의지하지 않으며 현재 가장 불평(不平) 중에 있는 자가 있다면 이태왕(李太王)과 이강공(李堈公)이 될 것이다. 이태왕(李太王)은 양위에 즈음하여 이강공(李堈公)을 황태자로 할 뜻이 있었으나 권세의 무리가 이를 배척하여 왕세자를 후사로 정하자 이에 이강공(李堈公)의 한만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특히 이태왕(李太王)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절친한 사이이고, 또 궁궐의 간수는 견고하여 일상소식을 통하는데 장애가 많아서 마땅히 이강공(李堈公)을 통하여 이 운동을 하여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결정하였다.

심인택(沈仁澤)은 이태왕(李太王)에게, 정일영(鄭馹永)은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을, 박봉래(朴鳳來)는 양반 사이에 동지를 구하는 운동을 담당하고 7월 7일부터 7월 15일까지 이후 동일부터 27일 본 건으로 검거되기에 이르기까지 다음의 행동을 하였다. 

9)제1차 세계대전(1914)은 독일의 승전으로 돌아갈 것이 명백함으로 종국 후에는 칼끝을 동양을 향하고 일본을 공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중국은 일본에게 원망(積怨)이 있음으로 독일과 연합하여 일본을 고립에 빠트릴 것이니

이때가 바로 조선독립회복의 시기가 됨으로 독일 및 중국을 향해 지금부터 연락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두 나라는 제정(帝政)이어서 공화정치를 표방해서는 목적을 이루기 어려우니 차라리 이(李) 왕가를 이용하는 것이 득책이 되기 위해 신한혁명당의 조직을 협의하고 본부를 북경에, 지부는 우선 중국에는 상해, 한구, 봉천, 장춘, 안동현, 연길부에 조선에서는 경성, 원산, 평양, 회령, 나남에 설치하고 재정, 통신연락, 단원 모집을 개시할 것을 협의하고 본부장에 이상설(李相卨)을 추대하고 그 아래에 재정, 교통, 외교부를 두고 외교부장은 성낙형(成樂馨), 교통부장은 유동열(柳東說), 재정부장은 이춘일(李春日)이 담당하는 것으로 하고 상해지부장은 신규식(申圭植), 감독은 박은식(朴殷植)으로 하고 장춘지부장에는 이동휘(李東輝), 연길지부장에는 이동춘(李同春)10), 회령지부장에는 박정래(朴定來-북경에 있는 자라고 함), 나남지부장에는 강재후(姜載厚)를 추대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본 운동개시와 함께 필요한 비용은 중국혁명당(中國革命黨)을 모방하여 기부 및 기타의 징모(徵募)방법에 따라서는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상에서는 해적, 육상에서는 강탈을 하여도 무방하다했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당수(黨首)를 정하는 것으로써 동지 중 조선에 잠입하여 이태왕(李太王)에게 연락하는 것이 급무라고 결정하였다. 성낙형이 이를 담당하고 변석붕을 통해 계획했으나 성낙형과 변석붕 사이에 서신 왕복한 것 뿐이고 아직 면식이 없어서 유홍렬에게 소개장을 우송하였던 것이다. 또 혁명단규칙 및 취지서는 박은식(朴殷植)이 기초하는 것으로 협의 성립하였다.11)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에서 고종황제의 망명을 기도했다 실패한 이상설(李相卨)은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 박은식, 유동열12), 성낙형 등과 신한혁명당을 창당하고 고종황제와 의친왕, 김사준의 망명을 꾀하였다. 그러나 외교부장 성낙형이 1915년 7월 체포되는 바람에 실패하여 김사준은 1915년 10월30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형무소 복역 중에 병 보석된 후 곧 사망하였다.13) 이 때 체포된 사람은 의친왕의 장인인 김사준14)을 비롯하여 김사홍, 김승현, 변석붕, 김주원, 심인택, 박봉래, 정일영, 염덕신, 이경창15) 등이었다.

보안법 위반 사건의 의친왕관련 부문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제는 이 사건을 사법비밀로 처리하였다.

“한편으로 경각서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강공(李堈公)에게 개입하여 이태왕(李太王)을 설득하고자 하여 먼저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하기 위해 동 공비의 아버지인 김사준(金思濬)의 4촌 종제인 김사홍(金思洪)에게 그 계획을 설명하고, 성낙형(成樂馨)을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그 지름길로 김사준(金思濬)을 면회할 기회를 달라는 뜻으로 위촉하자 김사홍(金思洪)은 이에 찬동하며, 7월 22일(음력 6월 11일)경 김사준(金思濬)에게 가서 그에 대해 성낙형(成樂馨)의 계획을 설명하고, 김사준(金思濬)도 이를 찬동하여 성낙형(成樂馨)과 면회하고자 하였다.

이에 성낙형(成樂馨)은 7월 26일(음력 6월 15일) 오전 10시 김사홍(金思洪)과 더불어 상하이(上海) 회의의 결과로 이루어진 김주원(金?元)이 정서한 중한의방조약안을 휴대하고 김사준(金思濬)의 집에 가서 부인++ 신한혁명당은 무력으로 국내로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16)

1. 군병 출구시 퉁화(通化), 화이런(懷仁), 지안(集安)현 3군의 군병은 합동해 초산군 전구를 건너 습격해 신의주에 유진할 것.
2. 왕칭(汪淸)현 군병은 계현 등의 지역에 출몰해 일병을 유인하여 장마촌의 후구를 습격할 것.
3. 푸쑹(撫松)현 군병은 연락해 옌지(延吉)부·시베리아 구원병을 합해 두만강을 거슬러 회령과 나남면에 유진해서 돌격할 것.
4. 뤼순(旅順), 다렌(大連)의 원조병과 펑텐(奉天)군대를 합쳐 잉커우(營口)의 기차를 급속히 차단할 것.

이러한 군사계획을 세운 것은 중국과 독일이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국, 영국, 러시아도 모두 이를 원조할 것이며, 이때 우리 군대는 일본군 운반의 요새지를 방어하면 일본군은 상하로 분열되어 전승하리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리하여 일본이 산뚱(山東)지역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한혁명당은 이 기회에 우리의 독립군도 각국과 연합하여 독립쟁취의 길을 모색하고자 계획하였다. 이러한 상황판단을 전제로 독립전쟁 준비계획이 추진되었다. 신한혁명당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정비는 기존 독립군과 무기 등을 기반으로 할 수 있었으므로 보다 신속하게 조성될 수 있었다. 즉 시베리아지방의 중심단체인 권업회가 강제 해산당하기 직전에 조직했던 대한광복군정부가 비밀리에 구성한 군대조직이 그 모태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러일전쟁 10주년인 1914년을 맞아 러시아 전역에 대일 복수열이 절정에 달하여 대일 개전의 조짐이 보이자,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종호(李鍾浩), 정재관(鄭在寬)17) 등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와 중국에 산재한 동지를 망라하였다.

이어 정도령을 선거하여 군무를 통할케 하였는데, 초대는 이상설(李相卨), 다음은 이동휘(李東輝)가 되었다. 군대를 비밀리에 편성하고 중국 왕칭(汪淸)현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대전학교, 동림학교도 설립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만주(滿洲)와 시베리아를 비롯한 국외 모든 독립운동 무장세력을 규합해 광복군으로 총괄하려는 군사령부적 성격의 단체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권업회 해산과 동시에 대한광복군정부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비록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에 관여한 인사들이 신한혁명당에 동참하면서 군사적 기반이 신한혁명당의 군비로 전환될 수 있었다. 신한혁명당은 이를 토대를 독립전쟁을 대비해 국내 국경지역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18)

신한혁명당 사건이 실패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에서 군주제를 주장하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점차로 공화제를 주장하는 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각주)-----------------
 이성복(李聖復)이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하였음.
 1915년 6월 상하이(上海)에서 병사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인으로 김자순의 집에 신화민단(新華民團)을 설치하였다.
 조욱(曺煜)이란 이름을 사용하였음.
 김삼웅: 이회영 평전, (주)책으로 보는 세상, 2011. 115쪽-116쪽
 김희곤: 독립군을 기르고 광복군을 조직한 군사전문가 조성환, 역사공간, 2013.  50쪽
 안뚱(安東)에서 펑텐(奉天)까지의 남만주철도
 위안스카이(袁世凱)
 警高機發 제1358호 5.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검거의 건(『조선통치사료』 5, 1915. 9. 27) -(2)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 검거의 건 1915년 9월 27일 접수 보안법 위반 사건 검거의 전말
 함경북도 회령출신인 이동춘(李同春)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통역관으로 고종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자 연변 개산툰 일대로 망명하였다. 이동춘(李同春)은 연길에서 동남로관찰사공서의 고급관원이 되어 한인사회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었다. 1909년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여 경영하였고, 1912년 12월에는 간민회 결성에 관여해 식산흥업 과장직을 맡는 등 북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동춘(李同春)은 이동휘(李東輝), 이용(李鏞), 구춘선(具春先), 김립(金笠), 윤해(尹海), 최진동(崔振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14년 신한혁명당을 조직할 때, 이동춘(李同春)은 옌지(延吉)지부장에 선임되어 최진동(崔振東)과도 자주 만났으며, 후에 박영(朴英, 泳, 應世), 이춘승(李春承) 등과  함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에 중대장으로 가담하였다.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최진동 장군, 흑룡강 조선 민족 출판사, 2006. 53쪽, 89쪽 
 警高機發 제1358호 5.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검거의 건(『조선통치사료』 5, 1915. 9. 27) -(2)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 검거의 건, 1915년 9월 27일 접수 보안법 위반 사건 검거의 전말
 유동열의 다른 이름은 이철이다. 일제기밀문서 1916년 9월15일 조선인과 독일인의 내통음모의 건: 김규흥과 이철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이 계획은 일본에 위협을 주는 것이므로: 1차세계대전 중인 1914년 8월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칭다오에서 전투를 벌였다. 김규흥은 폭탄을 제조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동맹을 방해하고 독일군 포로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순부 8권, 10년 (1917 정사 / 일 대정(大正) 6년) 3월 13일(양력) 2번째 기사, 양궁에서 이병규와 박주빈을 찬정 김사준의 장의식장에 보내다. 창덕궁(昌德宮)에서 사무관(事務官) 이병규(李秉規)를,덕수궁(德壽宮)에서도 사무관 박주빈(朴胄彬)을 각각 독립문(獨立門) 앞에서 있었던 고(故) 찬정(贊政) 김사준(金思濬)의 장의식장(葬儀式場)에 보냈다.
 경성의 불평단체: 김승현의 집을 사무소로 정하고, 천회(闡會)인 시회(詩會)를 1914년 1월에 조직한 것으로서 남작 김사준(金思濬)이 회장이고 회원은 김사홍(金思洪), 김승현(金勝鉉), 변석붕(邊錫鵬), 김주원(金?元), 심인택(沈仁澤), 박봉래(朴鳳來), 정일영(鄭馹永), 이용구(李龍九), 이승욱(李承旭) 등 불평의 무리들만이 아니었고 대개 이름을 시회로 빙자하고 일찍이 이미 재외 불평조선인과 연락을 통하거나 또는 불평의 모의를 한 기관인 것이다. 警高機發 제1358호 5.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검거의 건(『조선통치사료』 5, 1915. 9. 27) -(2)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 검거의 건, 1915년 9월 27일 접수 보안법 위반 사건 검거의 전말
 변석붕은 대원군파로서 1897년 모반사건으로 15년 유형을 받은 후 1907년 사면되었다. 김사홍도 같은 사건으로 15년 유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변석붕과 관련된 인물로 보인다. 김사준은 이강공의 장인으로 구 황실과는 사돈지간이며, 김승현 또한 그의 딸이 명성황후가 죽은 후 왕비간택의 약속을 받은 바 있던 인물이었다. 박봉래와 정일영은 왕실사무 담당관청인 궁내부 출신이며, 염덕신은 내승으로 광무황제의 시중을 드는 측근이었다. 국내조직의 이러한 이점을 기반으로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비밀리에 신속하게 광무황제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 17권. 1910년대 국외 항일운동 II-중국, 미주, 일본, 제 1부. 1910년대 중국 관내 항일운동, 제 2장, 국제적인 연대와 신한혁명당 2.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 17권. 1910년대 국외 항일운동 II-중국, 미주, 일본, 제 1부. 1910년대 중국 관내 항일운동, 제 2장, 국제적인 연대와 신한혁명당 2.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고종황제의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 언론통신사를 가장하며 고종이 만든 비밀첩보기관) 미주총책요원으로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장인환, 전명운 의거의 막후 기획자이다. 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안중근을 만나며, 1년 후 이토오 히로부미가 총살되었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 17권. 1910년대 국외 항일운동 II-중국, 미주, 일본, 제 1부. 1910년대 중국 관내 항일운동, 제 2장, 국제적인 연대와 신한혁명당 2.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V. 고려국 건설계획과 3.1운동

1. 양기탁과 정안립의 고려국 건립계획(1917년)

1917년 가을 중국 남방파 군벌인 주사형이 북방파 군벌을 견제하기 위하여 만주의 독립을 선전하고 다녔다. 즉 만주가 독립하면 만주의 한민족도 독립된다는 계획이었다. 실행방법으로 독군의 명의로 일본에서 무기를 차관하여 남방광뚱군 의 병력으로 일거에 만주독립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양기탁은 주사형의 계획이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국 건립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정안립의 동삼성한족생계회와 연계하여 맹보순, 장진우 등이 함께 고려국 건립을 계획하였다. 1918년 8월 양기탁은 주사형과 함께 간도를 출발하여 지린, 톄링, 창춘 등을 경유하며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기탁은 다시 상하이에서 주사형과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12월초 텐진에서 상하이 행을 준비하던 중 밀고에 의해 일경에 체포되었다. 고려국 건립 계획은 1918년 양기탁이 체포되고 주사형의 계획도 흐지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양기탁은 국내로 압송되어 중국 재류금지 3년과 거주 제한 처분을 받아 다시 부자유스런 몸이 되고 말았다.

양기탁과 정안립은 고려국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고종황제나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을 계획하였다. 1918년 텐진에는 이회영의 비밀조직이 활동하였기 때문에 양기탁과 이회영이 고종황제나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계획을 상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에 김하란사가 베이징에서 독살되는 것도 베이징에 독립운동 비밀조직이 관여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베이징과 텐진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같은 독립운동 비밀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양기탁과 손정도가 1924년 동우회에서 만나서 일하는 것도 같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양기탁이 텐진에서 일경에 체포된 후에 정안립이 고려국 건설을 주도하였는데 갑자기 고종황제가 독살되면서 망명계획이 잠시 연기되었다. 그러나 대동단장 전협이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의친왕 망명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전협과 정안립은 1910년대 초반 만주에서의 행적이 비슷하다. 정안립이 의친왕의 망명을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의친왕의 망명은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이 실패한 뒤로도 몇 번 더 추진되었다.

의친왕의 망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안립은 영친왕의 망명을 계획하였다. 영친왕이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다가 상하이에 기착하는 순간 망명을 결행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기권이 일본에서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영친왕의 유럽순방계획을 알렸으나, 일제가 사전에 알고 영친왕의 상하이 정박을 불허하여 실패하였다.

2. 정안립의 동삼성한족생계회와 조선고사연구회

1916년 만주에 온 양기탁은 미주의 안창호에게 편지를 보내 미주의 동포들이 만주로 이주하거나 자금을 내어 만주에 농장을 경영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주의 동포들은 군사나 무기가 있어도 독립전투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미주 동포들이 만주로 이주하거나 농장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자금이 넉넉한 미주 동포들 중 미화 5백 원 정도를 가진 여러 명을 만주로 보내 토지를 사서 모범농장을 경영하고 이익금의 1/2 내지 1/3을 공익으로 제공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 동삼성한족생계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양기탁은 오주혁, 정안립등과 함께 만주지방 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는 동포들의 생계를 증진시키고 안정을 꾀하여 서서히 결합력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동삼성한족생계회를 조직하였다. 지린성, 펑텐성, 헤이룽장성 등 동삼성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를 통일하는 기관으로 삼을 목적이었다. 본부는 지린성에 두고 회장은 여준, 부회장은 김약연이 선임되었고, 실무는 정안립이 맡았다.

V. 고려국 건설계획과 3.1운동
1. 양기탁과 정안립의 고려국 건립계획(1917년)
 1917년 가을 중국 남방파 군벌인 주사형이 북방파 군벌을 견제하기 위하여 만주의 독립을 선전하고 다녔다. 즉 만주가 독립하면 만주의 한민족도 독립된다는 계획이었다.

실행방법으로 독군의 명의로 일본에서 무기를 차관하여 남방광뚱군 의 병력으로 일거에 만주독립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양기탁은 주사형의 계획이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국 건립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정안립의 동삼성한족생계회와 연계하여 맹보순, 장진우 등이 함께 고려국 건립을 계획하였다. 1918년 8월 양기탁은 주사형과 함께 간도를 출발하여 지린, 톄링, 창춘 등을 경유하며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기탁은 다시 상하이에서 주사형과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12월초 텐진에서 상하이 행을 준비하던 중 밀고에 의해 일경에 체포되었다.

고려국 건립 계획은 1918년 양기탁이 체포되고 주사형의 계획도 흐지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양기탁은 국내로 압송되어 중국 재류금지 3년과 거주 제한 처분을 받아 다시 부자유스런 몸이 되고 말았다.1)
 양기탁과 정안립은 고려국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고종황제나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을 계획하였다. 1918년 텐진에는 이회영의 비밀조직이 활동하였기 때문에 양기탁과 이회영이 고종황제나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계획을 상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에 김하란사가 베이징에서 독살되는 것도 베이징에 독립운동 비밀조직이 관여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베이징과 텐진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같은 독립운동 비밀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양기탁과 손정도가 1924년 동우회에서 만나서 일하는 것도 같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2)

양기탁이 텐진에서 일경에 체포된 후에 정안립이 고려국 건설을 주도하였는데 갑자기 고종황제가 독살되면서 망명계획이 잠시 연기되었다. 그러나 대동단장 전협이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의친왕 망명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3) 전협과 정안립은 1910년대 초반 만주에서의 행적이 비슷하다. 정안립이 의친왕의 망명을 배후에서 지휘하였다.4) 의친왕의 망명은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이 실패한 뒤로도 몇 번 더 추진되었다.

 의친왕의 망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안립은 영친왕의 망명을 계획하였다.5) 영친왕이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다가 상하이에 기착하는 순간 망명을 결행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기권이 일본에서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영친왕의 유럽순방계획을 알렸으나, 일제가 사전에 알고 영친왕의 상하이 정박을 불허하여 실패하였다.6)

2. 정안립의 동삼성한족생계회와 조선고사연구회
 1916년 만주에 온 양기탁은 미주의 안창호에게 편지를 보내 미주의 동포들이 만주로 이주하거나 자금을 내어 만주에 농장을 경영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주의 동포들은 군사나 무기가 있어도 독립전투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미주 동포들이 만주로 이주하거나 농장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자금이 넉넉한 미주 동포들 중 미화 5백 원 정도를 가진 여러 명을 만주로 보내 토지를 사서 모범농장을 경영하고 이익금의 1/2 내지 1/3을 공익으로 제공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 동삼성한족생계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양기탁은 오주혁, 정안립등과 함께 만주지방 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는 동포들의 생계를 증진시키고 안정을 꾀하여 서서히 결합력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동삼성한족생계회7)를 조직하였다. 지린성, 펑텐성, 헤이룽장성 등 동삼성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를 통일하는 기관으로 삼을 목적이었다. 본부는 지린성에 두고 회장은 여준, 부회장은 김약연이 선임되었고, 실무는 정안립이 맡았다.8)
 
 1917년 12월 16일 지린성 간도 일대에서 정안립, 여준, 김약연, 이탁, 박무림, 김동삼, 윤세준, 맹간, 전영일, 여종렴, 박태려, 유동열 등은 항일독립운동 자치조직인 동삼성한족생계회의 설립을 중국의 대총통, 국무원 총리, 외교부와 내무부 총장 등에게 청원하였다.9)

이들은 만주에 독립국(고려국)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하였는데, 이 회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정안립이었다. 동삼성한족생계회의 설립이 추진되자, 1918년 1월에 이범윤이, 2월에는 이동휘가 지린을 방문하였다.10) 이 조직은 노령의 한인사회와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와 연계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 조직을 ‘한국독립회’라 일컫고 정안립을 안중근에 비유하며 ‘정선생’이라고 존칭하였다. 정안립은 동삼성을 5대 구역으로 나누어 회원모집에 나섰다. 5대 구역11)은 제 1구 백두산 부근, 제 2구 서간도, 제 3구 안봉선, 제 4구 북간도, 제 5구 동청선이었다. 1918년 4월13일, 14일에 지린성성 소동문외에 있던 정안립의 거처에서 동삼성한족생계회 제 1회 총회가 열렸다. 참석인원은 26명이었는데 모두 중국복장으로 참석하였다. 일제는 이 회의 성격을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단체로 독립 자치의 기초를 만들고자 하는 단체로 인식하였다.12)

1918년 12월 18일 서울 돈의동 장춘관에서는 정안립, 맹보순,13) 이상규 등 80여 명이 명목은 조선 고대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만주에 고려국을 건설하기 위한 모금을 목적으로 조선고사연구회를 발기하였다.14)

  동삼성한족생계회는 일제의 방해공작 등으로 1918년 11월경에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9년 1월 부민단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때 부족한 경비는 동삼성한족생계회의 재산을 사용한다고 결의한 흔적으로 보아 동삼성한족생계회가 파리(Paris) 강화회의 밀사파견에 관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15) 1918년 4월2일 일제 정보보고인 ‘노지령 지방의 배일선인의 상황’에 의하면 이동휘, 양기탁, 조성환이 독일과 러시아가 일본과 충돌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서 부지런히 활동하던 인물로 지명하면서 생계회라는 조직이 성립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조성환은 이동녕, 양기탁등과 함께 지린으로 돌아왔다.16)

  일제가 1920년 4월20일 조선 총독과 육군대신 앞으로 보낸 문서인 고경 제 9818호 ‘지린성에서의 조선고대사연구회 해산에 관한 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나 지린에 거주하는 조선인 정안립, 맹동전, 양기탁 등은 지나인, 주사형과 같이 모의하여 1918년 9월 들어왔다.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으로서 만주에 독립국(고려국)을 건설하고자 기획했다. 후쿠오카현 사람인 스에나가 미사오가 참여하고 획책한 바 있다. 그리고, 양기탁은 1918년 12월11일 텐진 주재 제국총영사로부터 재류 금지를 명령받고, 주사형은 당시 자금을 수집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갔으나, 소식이 두절되어 계획이 거듭 무너지고 꺾였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의 뜻을 번복하지 않고 도쿄과 만주에서 비밀리에 모의를 진행하였다.

규칙을 기초하였고 기와 휘장 등을 준비하였다. 12월 18일 스에나가 미사오와 정안립, 이상규 등 약 50여명이 경성부 돈의동 장춘관17)에서 회합하여 조선고사연구회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본회는 조선고대역사의 실제적인 발자취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조선 민족의 발전을 비보함에 목적한다고 칭하였으나, 그 실은 조선인으로 만주에 독립국을 건설하는데 있음은 대동민국 창립 장정 문안에 의해서도 확실히 나타났다. 이래에 회원의 행동을 주의한 바 최근에 이르러 간부 등은 관헌의 양해를 얻었다고 칭하고 회원과 기부금 모집에 분주하기에 이르렀다. 본 건은 실은 만주에서 음모를 꾀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다만 일본과 지나의 국교를 해할 뿐 아니라 조선의 치안에 관계함이 적지 않음으로서 경기도 지사는 소할 경성 동대문 경찰서장으로서 동 회장 이상규, 총무 김병수를 소치하여 해산을 엄히 훈육한 바, 그들은 이를 승복하고 4월1일 동 회를 해산하였다. 발송선: 내각총리대신, 외무대신, 육군대신, 척식국장관, 아까스까 총영사, 조선군 사령관’18)

 이 사실은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만주에 고려국을 건설하고자 기획하였는데 중국에서 자금 모금이 순조롭지 않지만 뜻을 유지하며 도쿄와 만주에서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있으며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1919년 4월 정안립은 여준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안’을 제출하기 위한 대계획을 수립하였다. 정안립은 민족의 자립과 독립을 꾀하고, 중국, 러시아, 조선 세나라가 서로 화합하는 것을 앞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 관헌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일제가 1919년 10월3일 발신한  ‘기밀공 제 58호(비수11915호) 불령단 관계 잡건 ?조선인의 부 ?재만주의 부 12선인 비밀집회 상황보고의 건’19)에 의하면 ‘정안립을 수령으로 하는 각지 조선인 동지 제1차 비밀회의를 1919년 9월22일 지린 북쪽 뒷산의 여관에서 개최하였는데, 중국(지나), 조선 및 러시아의 세 민족이 결속하여 만주, 몽고 및 러시아 영토를 연합한 새로운 하나의 한 연합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정안립은 이러한 계획을 단행할 실력이 있느냐 질문에 대해 무형적으로 오직 민족의 결사적인 용감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군자금 등에 관해서는 비밀이라며 설명을 피했으며, 회의 참석자들은 정안립을 추대해서 러시아와 중국 지역 조선인 총대표로 만들고 재정외교를 대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정안립은 대표를 고사하였고 의친왕과 영친왕 중에 누구를 추대하느냐는 논의에서, 영친왕을 반대하는 사람이 다수여서 의친왕 추대하기로 하고 재정외교는 정안립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한중연합 수뇌회 개최, 마적 두목 김정신 초청, 임시연합군정부 설립, 의친왕 호송, 군자금 조달 등을 결의하였다.

정안립은 비밀회의 기록장부를 오가와 서장에게 보고한 동기가 어디에 목적이 있는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만일 이러한 계획이 그들의 순수한 정치적 사상에서 빚어진 것이거나 현시점의 일반 조선인의 망상이 소위 구한국의 회복 독립이라면 그 취지를 달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과거 그들의 조상의 역사에 기인한 한 편의 공상임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정안립이 이 계획을 동지 이외에는 절대비밀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결의서를 특히 오가와 서장에게만 제시한 것은 심중을 의심할 만하다. 그들은 아무런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러시아와 중국 측의 관련자에게도 사전에 어떤 양해를 얻은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중국관헌의 조선인 행동에 대한 비밀조사 단속은 비교적 엄중하다. 오늘날 이러한 계책의 단행은 의심스러울만하다. 더욱 지속적으로 주의 중에 있음을 우선 알려드립니다. 위와 같이 보고 드립니다. 大正 8년(1919년) 10월 3일’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9년 12월13일 관동군 참모부에서 보낸 관참첩 제681호20)에는 정안립과 이규 등 10여 명을 체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정안립 등이 체포된 이유는 봉길문제 분규로 고사빈21)이 마적두목 김정신등과 공모하여 조선의 독립을 동삼성 독립으로 전환하여 동삼성과 시베리아에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기도하였다는 것이며, 수뇌는 정안립으로 과거 조선 관헌이었으며 의친왕의 망명미수사건에 관여하였는데 의친왕이 안뚱에 오는 것을 맞이하러 가다가 중국 측에 체포되었으며, 장쭤린과 가까운 시일내에 간담회를 갖는다고 기록되어 있다.22)

  정안립은 동삼성 순열사인 장쭤린을 일제가 암살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급히 전보로 알려 장쭤린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23) 그 결과로 정안립은 장쭤린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기권이 장쭤린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정안립이 역할을 하지 않았을 까 추측된다.
 
 일제 측 보고에 의하면 정안립은 1918년 8월, 동성한족생계회에는 비밀에 붙이고 일본을 여행하였다.24) 이때 정안립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의 를 받았고, 귀순 표명을 하였다고 한다.25)

아마 1918년 8월7일 정안립은 장우근과 일왕을 독대한 것 같다. 실권자인 테라우치 마사다케 1916년 10월-1918년 9월 총리대신역임) 총리대신은 만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26) 이때 야당당수로 도야마 미쓰루27)와 중국인 2명이 배석하였다는데 도야마 미쓰루는 만주에 고려국을 세우는 일에 호의적이었다. 일본 내각에서는 조선 총독28)이 승인해주면 고려국 건설을 고려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안립은 서울에서 조선 총독을 만나 고려국 건설을 타진하였으나, 승인을 받지 못하자 조선 총독에게 잉크병을 던지며 통치의 잘못을 꾸짖었다고도 한다.

정순택이 기록한 정안립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29)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이 민족자결권을 부르짖자 일본 정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정황을 살피고자 하여 대상을 물색할 때 만주벌판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는 정안립이 적임자로 보였다. 당시 정안립은 간도의 수령이라 칭했고, 두세 명의 회장과 같이 일하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처조카인 장 씨라는 분30)이 있었다.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분이었다. 그를 앞세워 타진했는데, 정안립은 어떠한 처지에서 지목되었는지 정확히 판단하고는 농락하기로 작정하였다.31)

 그리고, 첫째로 비용을 스스로 조달할 것이고, 둘째는 일본에 건너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다 할 수 있어야 하며, 셋째는 ‘지린’으로 무사히 귀임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일본정부에서는 군말 없이 이를 수용하였고, 때 맞춰 내각을 소집하여 각료회의를 열어 총리와 면담이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공개하였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기대했다면 오금이 저렸으련만 기개를 보여주고 싶었을 터이니 당당했다고 한다. ‘만주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알다시피 우리는 가진 게 없다. 부득이 손을 내밀고 있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첫째가 자금이고 둘째가 병력인데, 6만 명의 군사를 맡겨주면 만주에서 활개치고 있는 군벌들을 쳐부수겠다. 그래서 국가가 건설되면 일본이 맹주로서 군림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한국과 일본, 중국이 안정되어 더욱 발전할 것이다. 자고로 동양 삼국은 세 발로 서 있는 솥단지 같다. 그런데 일본은 한 발을 자르고자 한다. 만약 쓰러진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생쌀로 허기를 달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서로가 불행한 것이니 우선 막고 보아야 할 일이다. 일본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고 넉넉히 밥을 지어 같이 먹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상상하지 못한 말에 각료들은 웅성거렸고, 여기저기서 컵에 담겨 있던 물이 춤을 추었다. 그에 맞춰 일본 수상은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졌다. ‘만주에 국가를 세우면 조선은 어찌할 것인가?’ 처음부터 말장난이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귀국의 소신껏 하라.’ 정안립의 서슴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농락하면서도 본심의 일부는 들어낸 것 같다. 일본의 자금을 끌어들여서라도 터전을 닦은 후, 고종황제 혹은 영친왕이나 의친왕을 모시고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정안립을 입헌군주론자라고 하였다.

 우리민족의 새 터전을 마련할 자금이 필요한데, 궁여지책으로 손 내밀게 되었다며 포부를 밝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만주벌판에 이주하여 ‘고려’라는 나라를 세우면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겠는가. 일본은 옛날부터 섬에서 탈피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간도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 능력이 있다. 문제는 넉넉한 자금이다.

 전쟁사를 보면 힘을 비축할 때까지 잠시 땅을 내어주어 적이 포만감에 히죽히죽 웃게 하는데, 교묘한 일본은 안 말려들었던가 보다. 총독의 결재만 받아오면 지원해 주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결과적으로 빈손으로 나왔는데 문제는 그 후였다. 언제나 그림자와 같이 하여 조그마한 일조차 알려지는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안립은 김규흥, 박용만과 같이 둔전제를 실시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시정부와 교감을 이뤘고, ‘대고려’국이 건설되면 합한다는 약조가 있었다고 한다.
 1958년 5월 박계주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대지의 성좌’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정안립이 간도로 망명하여 <농민회>와 <대성유교>(공교회)를 만들어서 간민회에 반기를 들었다. 정안립의 주장은 <독립 정신을 가진 자는 독립운동을 할 것이요. 간민회는 농민들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즉 독립운동자가 간민회의 탈을 쓰고 일반 주민을 지도한다는 것은 부당하니 농민 자신에게 자치행정을 맡기라.>고 공개적인 성토를 하면서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간민회로서는 정안립과 그 일당을 일본의 앞잡이인 주구들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정안립은 이범윤 일파의 잔여인사들과 손을 잡고 진심에서 애국운동을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기미년 3.1운동이 있기 전에 그는 북간도 대표 5인을 자의로 선정하여 멀리 중국 광뚱에 가서 국민당의 두령 쑨원 총리를 면회하고 한인의 독립운동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32)33)

 정안립은 쑨원과 장제스등을 만나 조선의 실정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존명당을 조직하여 4만 여명의 당원을 모았으며, 60만 원의 자금을 확보하였다.‘34)
 ‘의군부는 이범윤이 간도관리사 시대에 그를 추종하며 북간도 최초의 독립군이었던 사람들이 지난 10년간 농촌에 파묻혀 있으면서 정안립과 함께 농민회와 공교회를 만들어 농민운동과 유교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그 존재가 희미했었다. 그러다가 기미년 3.1운동이 있은 직후 각지에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력 독립단체인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의군부의 총재에는 일찍이 시베리아(Siberia)로 망명해버린 이범윤을 명의만으로 추대하고 총사령관에 김현규, 참모장에 진학신, 총무부장에 최우익, 군사부장에 김청풍, 외교부장에 신립, 통신부장에 지우강이었으며, 본거지는 연길현 명월구 였다.’35)

 의군부의 최초 근거지는 봉오동 입구에 있는 가야하 동쪽의 초모정자, 동림동에 두었다가 옌지현 이란꺼우를 거쳐 옌지현밍웨꺼우로 이동하였다.36) 당시 의군부는 5개 대대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정안립은 이범윤과 같은 노선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3. 정안립

정안립(1873~1948)37)은 진천출신으로 본명은 정영택이다. 1888년에 전우의 문하생으로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한 후,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였고, 1897년 한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02년 혜민원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1904년 법관양성소 교관으로 천문학 강술을 하며 감독사무를 보았다.

1905년 5월5일 고종황제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보성전문학교 학감과 교감을 지냈으며, 1909년 2월 3대 보성전문학교 교장38)을 지냈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교육구국운동을 하였다.

1908년 2월 기호흥학회39)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09년 5월 10일 청주에 보성학교를 설립하고, 오창면 기암리에는 기암학교를 설립하는 등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주갑부 민영은40)과 처남 매부지간이어서 민영은의 후원을 많이 받았다. 1910년 7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태은, 김만배, 이증수 등 여러 동지들과 우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정태은, 김만배 등과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정안립은 안질로 검역에서 탈락하여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을 더 많이 알기 위하여 정안립은 양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정안립은 양성군수 재직도중인 1910년 11월 질이 나쁜 일본인을 죽기 직전 까지 때리고 자금을 몸에 지닌 채 상복차림41)으로 원산에서 배를 타고 룽징춘으로 망명하여 이름을 정안립 이라고 개명하였다.

1911년 이범윤과 합심하여 농민회와 공교회를 조직하여 농민운동과 유교운동을 하였다. 정안립은 모범학당 학감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서일과 중광단을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였다. 1911년 6월 정안립은 사숙개량회를 조직하여 낙후된 한학 사숙을 일으켜 이주한 북간도 학자간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12월에는 국자가서 간민회42)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힘썼다. 1915년 6월 정안립은 간도방면의 예수교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6년 12월 정안립은 간민회 대표로서 중국에 입적한 한국인의 한인 관할 문제에 관한 청원서를 중국 외교총장에게 발송하였다. 1917년 12월 정안립은 독립자치의 목적으로 동삼성한족생계회 대표 및 존명당 대표43)를 지냈는데, 동삼성과 시베리아(Siberia)에 당원이 4만 명이고 자금이 60만원으로 그 세력이 지린, 퉁화, 창춘, 싱징, 류허, 허룽, 옌지 각 현과 북 하얼빈 지방까지 아울렀다.

1919년 4월 파리(Paris) 강화회의에 정안립은 여준등과 함께 조선독립안을 제출하였으며, 대계획을 수립하여 쑨원과 면접하고 임시정부 국회의원 측에 운동을 하였으나, 부결되자 무력시위를 하였다. 1919년 간도방면 항일 조선인 집회 정황에는 지린에서 정안립을 수령으로 하는 독립군 부대44)가 무산방면으로 진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45)46) 1919년 만주에 고려국을 건설하기 위한 모금목적으로 맹보순47), 양기탁, 이상규48), 김병수49) 등 약 50여명이 경성부 돈의동 장춘관에서 회합하여 조선고사연구회 발회식을 하였다.

 1920년 4월10일 동아일보에는 동년 1월18일 정안립, 일본인 스에나가 미사오50)과 장춘관에서 조선고사연구회 창립총회를 하였다는 기사51)가 있으며, 1921년 12월15일 동아일보에 ‘대풍수전공사발기’란 제목52)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동삼성의 수전 개척과 기타 농민에 대한 유리사업을 목적으로 하야 중국 지린성에 재류하는 정안립, 맹은원씨등 조선인 급 중국인 20여인의 발기로 자본금 5백만 원의 대풍수전 고분공사를 계획 중이라는데 주식 반분은 조선 내지에서 모집키 위하야 정안립씨와 중국인 방효낭, 항석진양 씨는 일전에 입경하야 여화원에 체류 중이라더라.’

 정안립은 대풍수전공사 설립을 위한 원조를 청하기 위해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와 직접 접촉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일본측 세력과 제휴하여 중국 영토를 침범하기 위한 배신 행위로 알려졌으며, 특히 재만 중국인들 사이에서 심한 마찰이 생겨 좌절되고 말았다.

 정안립은 1924년 7월에도 화풍수전공사라는 새로운 회사의 설립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전에는 현지 중국인들의 반발로 유한공사의 설립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을 반성하여, 이번에는 저명한 중국인 인사들이 다수 포섭함으로써 계획을 성공시키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화풍수전공사의 목적사업은 중국인 측에서는 유리한 토지로 출자하고 한인측에서는 상당한 개간비를 판출하여 수전을 경영하고 토비를 방어할 계획이었다.53)

 그리고 1925년 4월21일 ‘용산서 활동음모사건 발각”이라는 기사54)는 다음과 같다.
’정안립의 사돈인 권보상의 집에 상하이임시정부의 특파원이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주류한 형적이 있었고, 중대사건 연루자가 용산에 잠복하였던 사실이 있다는 단서를 잡아 권보상을 취조한다.‘

 ’권보상55)의 동생인 권명상은 모 사건으로 수감된 후 출감하여 펑텐에 있으며, 조카 권희목56)도 장쭤린 군의 군의로 참전하였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권보상은 1907년 설립된 국문연구소57)의 내부 서기관을 지냈는데 주시경, 지석영등과 같이 활동하였다. 동아부인상회58)는 1920년 조직됐던 주식회사 겸 협동조합으로 기혼 여성만으로 결성된 조직이었으며 부인들이 필요로 하는 가정용품을 주로 판매하였다. 이 때 권보상은 상무원 이사로 김성수와 같이 활동하였다.

 또 1925년 11월21일 동아일보 ‘수상한 정안립’ 기사59)는 다음과 같다.
 ‘기미년 3.1운동이 있은 후 한참은 만주방면에서 민족운동을 하다가 년전에 일본당국의 양해를 얻어 만주에 무슨 회사를 설립하고 조선 사람을 이민시키자는 주창을 한 일로 세상에서는 좋지 못한 비평을 하여오던 정안립은 한 달 전부터 만주에 있는 박찬익, 박취석, 김병희등 몇 사람과 자주 상종을 하여 왔다는데 운동자금이라고 민병O에게 돈 오백 원을 청구하다가 그만 거절당하고 11월 초에는 김병희를 펑텐으로 파견하여 자금을 모집한 일이 있었고, 근일에는 김병희와 수 명을 조선 내지로 파견하여 자금을 모집하는 중이라는데 정안립이 그 모집한 돈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는 지 당국에서는 매우 주목을 한다더라.’

김병희60)는 1919년 박용만의 지시로 박상환과 함께 김성수와 민영달을 만나러 가다가 청량사에서 일경에 체포된 사람인데 1925년에는 정안립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일본측 세력과의 유착관계로 인해 정안립의 운동은 내외의 한국인 사이에서 매우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관련해서 임정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는 '대고려국' 운동의 배후에 미츠노 렌타로 등의 후원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당초 부터 정안립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갖고 비판적으로 보았다. 동아일보에서는 그가 시도한 모금활동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그 외의 정안립 관련기사는 다음과 같다.
  ‘만주에다 대고려 왕국을 건설한 다고 분주히 활동하던 정안립은 1927년 7월10일 종로서에 검거되어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었다.’61)
  ‘정안립이 세계연방 자유연맹을 조직하려 했다.’
 1927년 정안립은 만주를 중심으로 세계평민, 호조, 합작, 경제균등 등의 정신을 근본으로 하고 생존상 자유평등의 장해를 제기하여 세계평민자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며 세계개조를 위하여 동서의 필요한 지대에 근거를 두고 세계평민 연방 자치기관을 건설하며 세계 공용어와 공통 화폐를 사용하는?것 등 여러 가지 강령을 가진 세계연방자유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선전하기 위해 국내로 귀국하였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62)

 ‘용의조선인 명부’ 227쪽에는 정안립이 만주사변 후에 상하이에서 동아국제연맹 1933~1940)63)을 조직하여 일본과 중국 등을 무대로 특히 도쿄에 있는 대관들에게 진정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중부서에 연금되었다.
 
4. 흑룡회와 중국혁명동맹회의 구상
 1901년 2월 우치다 료헤이의 집에서 '흑룡회'가 발족되었다. 흑룡회는 창립되자마자 일본과 러시아 간의 주전론을 맹렬히 주장하였다. 흑룡회 사람들은 중국의 혁명운동가들인 쑨원, 장빙린, 쑹자오런과 일진회 이용구와 송병준과 친교를 맺었다. 흑룡회는 성립당시부터 러시아를 의식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Siberia)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끝났지만 흑룡회의 만주 일대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그들은 만주에 신국가를 건설하여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방벽으로 삼을 계획을 수립하고자 했다.64)?한편 중국혁명동맹회는 일본으로 망명한 멸만흥한파 중국인 혁명가 인사들이 와 손을 잡고 대동단결하여 만든 모임인데, 이들은 당시의 청나라 조정인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국가를 재건하는 것을 지향하였고, 그 때문에 만주와 몽골 지역에 대해서 특별한 소유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도 러시아가 만주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남하를 저지할 필요는 있다고 여겼다.

장빙린은 만주와 몽골을 방기해 두면 한족의 영원한 화근을 남긴다며 사람이 드문 공백지 만주를 러시아의 손에 넘기는 것을 반대하면서, 속히 만주를 공개해서 토착지를 지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만주와 몽골에 이주하는 민족에 대해서는 굳이 한족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흑룡회(만주 신국가 건설), 중국혁명동맹회(만주의 토착화), 일진회(회원의 생활 보장) 세 그룹의 뜻이 합치되어 탄생한 프로젝트가 바로 일진회 백만 회원의 만주 이주 계획이었다. 1907년 8월, 일진회 재단 선언서가 발표되면서 '일진회 재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흑룡회가 출판한 ‘동아선각지사기전’에 의하면,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오 히로부미 통감에게, 한일병합운동이 성공하면 일진회에게 40만 엔 이내의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건의했고, 통감은 이에 찬성하면서 50만 엔 정도를 조달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도 한일병합에 따른 지원을 요청하여 약속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우치다 료헤이와 이용구, 송병준은 한일병합 성사 직후, 일진회 회원 1백만 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조만간 일어날 지나 혁명을 틈타 만몽의 독립을 달성하면서, 한일연방을 본뜬 만몽 연방을 창설하여 동아 대연방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기에 앞서 미리 다수의 회원들을 간도65) 지역에 선발대로 보내고 있었다.

1910년 9월 12일 한일병합 이후, 일본 정부는 식민지 조선 내에서의 일체의 정당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일병합을 강력히 추진했던 일진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정당과 함께 일진회는 해산되었고, 해산 비용으로 15만 엔을 지급받았다. 50만 엔을 지원해주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해산비용을 나누어보았자 한 사람 앞에 겨우 10전 정도만 떨어질 뿐이었다. 이래서는 내정개혁이니 봉황의 나라니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일진회는 존재하지 않고, 정치에도 관여할 수 없다. 만주 이주로의 길이 끊긴 일진회 회원들은 조선에서,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한일병합은 완전히 실패했다. 일진회가 해산하고 일진회재단의 계획이 좌절되자66),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과로가 누적되어 있던 이용구는 피를 토하고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이어서 설상가상으로 병합운동의 파트너 다케다 한시는 후두암을 앓게 되었다.

결국 1911년 6월 23일, 다케다 한시는 숨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1912년 5월 22일 이용구도 요양지 스마 에서 병사하였다. 하지만 일진회에 몸담았던 간부들과 나누었던 생활 보장의 약속은 여전히 시급한 문제였다. 우치다 료헤이는 이후 이용구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용구를 기념하는 사업과 만몽으로의 이민 사업 등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의 대고려국 구상, 그리고 만주국으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죽마고우인 다케다 한시를 잃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봉황의 나라 프로젝트가 물 건너간 이후, 곤도 세이쿄는 급격하게 흑룡회에서 멀어져갔다. 한일병합과 일진회재단, 봉황의 나라 계획은 일본 정부에 의해 실패한셈이 되었고, 곤도 세이쿄는 이를 통해 당시 일본 정권의 무서움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증오를 느끼게 되었다.

 1921년 흑룡회에서 한일병합 계획 논의에 참여했었던 스에나가 미사오67)가 다이쇼 일일신문에 '대고려국'의 구상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대고려국의 지역 결정안, 건국규칙, 헌법 초안68), 국기, 국새 등 대고려국 프로젝트의 대강이 나타나 있다.

대고려국이란 고대 연해주, 만주에 일대 세력을 펼치고 있었던, 조선민족의 조상, 부여족의 판도를 답습한 것이라고 한다. 북으로는 연해주를 포함하고 헤이룽강 하구에서 출발하여 헤이룽강을 따라 만저우리까지를 잇는 중국-러시아 국경선을 경계로 하고, 서로는 싱안링 산맥을 따라 몽골 사막을 경계로 삼으며,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을 따라 중국과 접경하고 산하이관에 들어가며, 한반도를 영역에 포함하는 거대한 판도이다.

여기서 한반도를 머리로, 연해주를 왼쪽 날개로, 몽골 초원을 오른쪽 날개로, 만주를 몸통으로 하면, 나라의 형태가 두 날개를 펼친 봉황의 모습이 되므로 이를 봉황의 나라라고 했던 것이다.

수도로 예정되어 있던 간도의 룽징춘은 봉황의 심장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여족의 판도, 대고려국, 봉황의 나라를 구상하는 데에 있어서는 곤도 세이쿄의 역할이 꽤 컸다.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한문과 역사책을 많이 접한 곤도 세이쿄는 자신의 역사적 교양과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이 건국될 대연방의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봉황의 나라는 앞서 일진회 재단의 설립요목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민중의 자치 집단으로 구성된 농업국가가 될 것이었다.

스에나가 미사오의 '대고려국' 구상에는 '일체의 국토는 모두 국가의 공유로 한다'고 하여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는 토지 사유를 금한다는 문구가 있다. 또 '봉황의 나라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인종, 민족을 불문하고 시민의 자격 권리를 갖기를 원하면 차별없이 권리를 부여한다.'고 하였다. 이는 장빙린이 토지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그 땅의 주인이라고 말한 것이 겹쳐지면서, 훗날 곤도 세이쿄가 주장한 사직국가론과도 닮아 있다.69)

 다이쇼 일일신문의 기사를 보면, '대고려국' 구상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재만 항일운동가들로는 이시영, 이범윤, 홍범도, 양기탁, 이세영70), 이동휘,?김규식, 안창호, 이승태, 안건근71) 등이라고 열거하고 있다.

 양기탁과 정안립은 의친왕을 망명시켜 고려국의 국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의친왕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전략을 독립운동에 역이용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이들은 해방 후에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친일파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각주)-----------------
 김성민: 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까지의 선도자 양기탁, 역사공간, 2012. 99쪽
 김성민: 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까지의 선도자 양기탁, 역사공간, 2012. 134쪽
 신복룡: 대동단 실기, 도서출판 선인, 2003.
  1919년 10월3일 발신한  ‘機密公 제 58호 불령단관계잡건) 조선인의 부(部) 재만주(在滿洲)의 부(部)12 선인(鮮人) 비밀집회 상황보고의 건’ 발신자: 森田寬藏(길림총영사), 수신자: 內田康哉(외무대신)
 정순택: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21쪽
 안천: 황실은 살아있다. 하, 인간사랑, 1994. 173쪽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40권 중국동북지역편 Ⅱ>해제, 특히 정안립이 주도한 동성한족생계회에 대해 일본측은 집요하게 조사하였으며 회유책을 강구하였다.---정안립은 이것을 역이용하였다.
 김성민: 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까지의 선도자 양기탁, 역사공간, 2012. 97쪽-98쪽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40권 중국동북지역편 Ⅱ> 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Ⅱ> 東省韓族生計會組織ニ關スル件, (180)朝憲機 제79호(大正七年 1월28일)(秘受四四六?號), 東省韓族生計會組織ニ關スル件
 국외항일자료, 일본외무성기록,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部-재만주의 部 7>?배일선인관광단 조직계획에 관한 건, 기밀공신 제41호, 1918년 10월07일, 배일선인관광단 조직계획, 장우근의 재만 배일한인 회유방안 제출, 장우근의 배일한인 관광단 조직, 배일한인의 관광 후 일본 귀순, 재만 한인회유책으로 토지경작 보호제공, 압록강연안 한인의 황무지 개간 증가,재만 한인에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금융 편의제공 필요, 일본의 吉林 한인에게 대출 및 토지매수자금 공급예정, 중국거주 한인의 회유 사실상 곤난, 중국귀화 한인의 일본귀순 시 국적문제 발생, 중국의 배일한인 비호, 장우근의 대한제국 경무관으로 신문과장 역임, 장우근의 만철 및 철령영사의 후원으로 육영학교 설립, 정안립의 대한제국 외부협판과 군수 등 역임, 정안립의 보성학교교장 역임, 정안립의 간도기독교연합전도회 평의원 역임, 정안립의 동성한족생계회 조직, 정안립이 袁世凱 앞으로 청원서 제출, 정안립이 동삼성 내 간민통할관서 설치 청원, 동성한족생계회 총회 개최, 이범윤과 이동휘가 정안립 내방, 정안립과 이범윤 이동휘의 동성한족생계회 발전 밀의, 동성한족생계회의 한족회와 대한인국민회와 기맥 상통.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40권 중국동북지역편 Ⅱ>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Ⅱ>東省韓族生計會組織ニ關スル件續報 (205)朝憲機 제214호(大正七年 4월18일)(秘受 7692호)
 박걸순: 북간도 간민회 해산과 추이, 중앙사론 30집, 중앙대학교 사학연구소, 2009. 236쪽-242쪽, 호는 東田, 유학자 1920년 4월10일 동아일보 3면 사회 “古史硏究會 解散”
 박걸순: 북간도 간민회 해산과 추이, 중앙사론 30집, 중앙대학교 사학연구소, 2009. 242쪽, 혹시 손병희가 장우근에게 1919년 2월 중순 송금한 돈은 아닌지 궁금하다.
 김희곤: 독립군을 기르고 광복군을 조직한 군사전문가 조성환, 역사공간, 2013.  59쪽
 1년 뒤 대동단원들의 모임이 장춘관에서 있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 >공판시말서 >공판시말서(三) 피고 金商說에게 문: 그런데 마침내 선언서는 11월 27일 오후 5시에 발표하기로 되어 동대문 안 한일은행 지점 앞, 조선은행 앞, 배재학당 앞 등 3개소에 자동차를 배치하여 동지들이 타고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혹은 도중에 노상 연설을 하면서 보신각 앞에 모이고, 학생, 기타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열심히 시위운동을 하지만, 노인조는 장춘관에 가서 요리를 먹고 손병희 등이 조용히 붙들려 간 것 같이 제2의 손병희가 되려는 계획이었다는데, 어떠한가? 답: 그러한 일은 없었다. 문: 그리하여 피고와 이종춘, 김익하는 지정된 시간에 장춘관에 가서[이겸용은 고향에 돌아갔기 때문에 參會하지 않음] 8명이 올 것이므로 5房에서 탁자에 앉아 요리한 상과 술 5병을 가져오라고 시켜놓고 부족하여 다시 술 5병을 시키고 전화를 걸어 묶여 갈 예정이었으나 아무도 전화를 거는 사람이 없어 밤늦게 귀가했다는데, 어떠한가? 답: 틀린다. 술 3잔을 마셨을 뿐이다. 문: 다만 이신애가 총독부에 내도록 봉투를 피고에게 맡긴 것만은 장춘관에 가기 전에 우편함에 투입하고 장춘관에 갔다는데, 어떠한가? 답: 그러함에 틀림없다.
 정순택: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116쪽-118쪽
 1919년 10월3일 발신한  ‘機密公 제 58호(비수11915호) 불령단 관계 잡건?조선인의 부(部) ?재만주의 부(部)12 선인(鮮人) 비밀집회 상황보고의 건’ 발신자: 모리다 칸조우(森田寬藏) 길림총영사, 수신자: 우치다 코사이(內田康哉)외무대신
 국외 항일 자료, 일본 외무성 기록> 불령단 관계 잡전, 조선인의 부, 재지나 각지 1, 關參諜 제681호 선인 소요사건 2 (1919년12월13일) 정안립(鄭安立), 이규(李圭), 김동진(金東鎭), 박건(撲建),박민근(撲敏根), 권색일(權色一), 오항(吳抗), 권성일(權誠一), 강일희(姜一喜), 정서권(鄭瑞權)
 장작림이 오패부에게 패하자, 고사빈(高士賓), 노영귀(盧永貴) 등이 흑룡강성 동남쪽의 소련 국경과 가까운 수분하(綏芬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사빈은 전 길림군 제1사단장으로 이전에 장작림의 책략으로 쫓겨났던 길림독군 맹은원의 사위였다. 옛 부하인?노영귀 역시?가담하여?제19혼성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수분하 주변의 중동철도를 장악하였다. 약 3,000여명 정도였던 반란군은 주변의 철도 경비대와 치안부대, 마적들까지 끌어모아 1주일도 안되어 15,0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패부는 고사빈을 길림성 토역총사령에 임명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42권 중국동북지역편 Ⅳ> 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Ⅳ> 권도상 형제 및 정안립에 관한 건] (68) 내전 제385호
 1916년 5월27일 이후 일제가 장쭤린(張作霖)에 대하여 2번의 암살시도가 있었다.
 정안립은 장우근과 합작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40권중국동북지역편 II>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I > 장우근/배일선인회유방법에 관한 건 大正7년(1918년)8월7일
 박걸순: 북간도 간민회 해산과 추이, 중앙사론 30집, 중앙대학교 사학연구소, 2009. 242쪽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0 40권 중국동북지역편 Ⅱ >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Ⅱ> 張宇根及鄭安立ニ關スル件(273) 政機密送 제106호, 張宇根及鄭安立ニ關スル件
 한국근현대잡지자료, 별건곤 제14호 >역대반역자 열전, 민중으로 일어난 갑오대변란, 동학군도원수 전봉준, 1928년 07월01일, 金秉濬.   갑신개혁운동의 수령 김옥균 선생은 일본에서 십개성상을 무료히 보내면서 항상 과거의 실패를 개탄하고 장래의 기회를 기대하고 있던 중 癸已(1893년) 가을에 한국 풍운이 점점 급전하여 감을 보고 인천의 모 동지를 중개하여 멀리 동학당과 기맥을 통하여 내응외공으로 일거에 군측의 간당을 삼제하고 청국의 세력을 구축하여 완전한 독립국을 만들기로 밀약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삼개월 즉 甲午(1894년) 봄 3월 28일 上海埠頭 一旅館에서 한국자객 홍종우의 총알이 무참히 김옥균 선생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이 참보를 접한 일본사회는 일시에 참매노호의 천지로 변하는 동시 頭山滿(도야마 미쓰루) 일파의 양인지사들은 이일을 심상 묵과할 수 없다하여 伊藤總理에게 弔合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에 끝나고 오직 김옥균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려고 하는 일파는 모험도한의 의를 결하야 鈴木天眼, 吉倉汪聖, 內田良平, 大原義剛, 大崎正吉, 田中侍郞, 白水健吉, 武田範之 등 16,7인이 부산에 도래하야 山紫 水明閣에 모여 한 단체를 조직하니 이것이 곧 동란사 중 一異彩인 소위 天佑俠이다. 때는 마침 甲午暮春이라 멀리 동학군이 전라 충청 일대를 석권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사를 토의한 결과 이제 동학을 도와 閔奸淸黨을 구축하고 김옥균 선생의 유지를 이루기로 가결하엿다. 그리하여 大崎正吉는 군자금 調辨과 무기 준비의 사명으로 귀국하여 頭山滿(도야마 미쓰루) 기타 동지의 斡旋으로 폭탄 및 자금 조달을 받아 가지고 부산에 회래하야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天佑俠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부산을 출발하여 동학군 본영을 찾아갈때 도중 창원에서 馬木金鑛을 습격하여 폭탄화약 등을 강탈하여 가지고 동학군 대본영 소재지인 순창에 도달하여 전봉준을 장대에서 회견하였다.    전봉준은 그 실패한 원인이 일본원병에 있다 하여 처음에는 심히 天佑俠 일행을 의려하다가 서로 필담교환이 오랜 후에 그 성의로 내원하는 것을 알고 그 다음날에 대연을 設하야 그 遠步의 로를 *慰하고 비장한 말로 「나는 시세의 불리로 일시 실패하여 此에 至하였으나 최후로 일대격전을 試하야 자웅을 결하려 하노니 원컨대 공 등은 周到한 지도가 있기를 바라노라.」고 하엿다. 기일후 마침 정찰대가 명일 중에 반드시 四路官軍의 내습이 있으리라고 보고하는지라 이에 天佑俠 일파와 함께 군사회의를 열고 각부서를 정할때 도총독이 전봉준, 군사에 한씨, 武田範之, 時澤右一, 동면군에 조씨, 田中侍郞, 日下寅吉, 남면군에 김씨, 鈴木天眼, 本間久介, 서면군에 배씨, 吉倉汪聲, 千葉之助, 북면군에 이씨, 大崎正吉, 大久保肇, 유격대에 이씨, 大原義剛, 井上藤三郞, 돌격대에 강씨, 內田良平, 西脇榮助, 이렇게 부서 조직을 끝
 당시 조선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16.10-1919.8. 조선총독)였다.
 정순택: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19쪽-22쪽
 의친왕의 외사촌으로 당시 철령에 거주하는 장우근(張宇根)임. 손병희는 3.1운동 2주전에 장우근에게 송금을 하였다. 이 자금이 정안립(鄭安立)에게 전달된 것 같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部-재만주의 部 7>장우근과 정안립의 동정에 관한 건, 12558(暗) 제70호, 1918년 09월27일, 장우근 여준 등 일본관광단원 선정, 정안립이 한인의 일본관광 불필요 聲言, 정안립과 장우근 中傷, 정안립과 장우근의 길림영사 방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5권 3.1운동편Ⅰ>제1편 3.1운동 관계 신문보도>?1. 국내신문 논설 기사>?대한독립신문, 대한독립신문 제10호 (간도), (출전)] 4252년(1919년) 4월 27일 발행 大正八年(1919) 6月 9日 신문계역한인. 존명당의 대활동, 廣東來信에 거하면 만주와 시베리아 거주 鮮人으로써 조직된 삼면초의 존명당 대표자 정안립은 上海에서 중국명사 憑自由와 동행하여 廣東에 지하여 국회의원과 신문기자 등을 방문하고 조선독립에 찬성할 것을 유세하는 동시에 該黨 대표자 2명을 上海에 파견하고 손일선, 손홍이 등의 연락을 통해 파리체재의 중국위원으로 하여금 조선독립문제를 회의하고 요구하기로 하였으나 중국 南地의 언론계는 성의로써 多大한 동정을 표하였다고.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5 5권 3·1운동편Ⅰ>?제1편 3.1운동 관계 신문보도>2. 국외신문 논설 기사>中華商報 (출전) 1919년 5월7일 발행, 한국의 혁명정형
 1958년 5월10일 동아일보 4면 생활/문화 ‘대지의 성좌’
 1958년 5월24일 동아일보 4면 생활/문화 ‘대지의 성좌’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최진동 장군, 흑룡강 조선 민족 출판사, 2006. 106쪽
 정순택: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김성수가 정안립을 대면할 때는 무릎을 꿇고 선생님으로 모셨다 한다.(정안립 손자 鄭昊溶 증언)
 1908년 1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발기인 정영택(鄭永澤)을 비롯, 기호인사 105명이 서울 신문로의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회장에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에 지석영(池錫永), 총무에 정영택을 선출하였다. 기호흥학회 월보 창간호에는 의친왕의 ‘咸與維新(함여유신)’이라는 친필을 실었다. 기호흥학회 교육부장 및 사무장 김가진, 찬무원 명부에 김사준, 장인근, 김창한, 김영진, 민영달, 김택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호흥학회,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역사>근대사
 2014년 10월31일 조선일보 사회 ‘친일파 민영은의 알짜배기 청주땅, 올해말 국가 귀속된다.’ 민영은은 겉으로는 친일을 가장했지만, 남모르게 독립운동가를 후원하였다. 올바른 친일파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의친왕도 망명시도 시에 상복차림으로 체포되었다.
 2006 봉오동전투승리 86주년 기념 학술회의 요지, 간민회 왕칭현 분회장에는 최명록(최진동)이 선임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1 41권 중국동북지역편 Ⅲ>?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Ⅱ> 鄭安立支那排日派?某ト提携, 獨立問題提起ノ件, (15) 來電 廣東 제59호 (秘受 4518號), 大正八年(1919년) 4月15日 午後 5時50分發 16日 午前10時35分 着, 廣東 井上中佑 總長 宛  ‘東三省及西伯利ニ會員約三百萬ヲ有スト稱シアル朝鮮人ヨリナル秘密結社尊明黨カ約六十萬ノ資金ヲ得其ノ黨員中一名ヲ朝鮮內地ニ派遣シ獨立運動シツ?アリシカ在上海黨員中鄭安立ナル鮮人支那ニテモ有名ナル排日派タル?某ト共ニ去ル八日廣東ニ來リ?ノ紹介ニテ國會ニ對シ朝鮮獨立問題ヲ歐洲會議ニ提出ノ件ヲ決議セシメントシ運動スル處アリタルモ國會ハ取合ハサリシト, 然ルニ鄭ハ昨夜國會議員新聞記者及基督敎會員十八名ヲ旅館ニ招待シ更ニ國會ニ對スル運動方哀願スル處アリタリ新聞紙上ニハ岑春煊ヲ訪問シ軍政府ノ援助ヲ求メタル旨記載シアルモ目下ノ處サル事實ナシ, 岑春煊ハ數日前ヨリ賢臟病ニテ一時ハ可ナリ重ナリシモ昨今ハ稍輕快ニ赴ケリ’
 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 제1장 초기 한인 이민 사회의 형성(1860~1919)>?국권피탈과 만주 한인사회>?북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는 안투(安圖) 현에서 이규(李圭), 강희(姜熹), 홍정찬(洪禎贊), 장남섭(張南燮), 이동주(李東柱), 조동식(趙東植), 오일(吳一)의병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를 조직하고 1919년 10월에 대한정의군정사로 개편하였다. 그 병력은 본영인 내도(?道)에 둔 100여 명 이외에도 소사동(小沙洞)에 240명과 화뎬 현 고동동(古桐洞)에 100명이 있었다. 1920년부터는 교련과장이었던 조동식의 전술이 그 위세를 전 만주에 떨치기도 하였다.
 이규(李圭), 강이중(姜以仲, 受禧))과 관련된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가 무산방면으로 진격하였다.  1920년 8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닝안현(寧安縣)으로 퇴각한 뒤 12월에 김좌진(金佐鎭), 이청천(李靑天) 부대와 합류하여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 대한정의군정사, 두산백과>한국사>일제강점기
 국외 항일 자료, 일본 외무성 기록> 불령단 관계 잡전, 조선인의 부, 재만주의 부 10,기밀 제 22호 정안립의 배일행동에 관한 건 (1919년5월17일) 이때 국자가 잡화상인 이복여(李福汝)는 강이중(姜以仲, 受禧)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이들은 정안립과 관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와 관련되어있다.
 용인출신으로 이회영과 친교가 깊다.
 회장
 총무
 스에나가 미사오는 동양척식회사와 흥업은행이 1천만 원을 지출하여 한국인 측에 대여하고 그들을 개척 사업에 종사시키며, 또한 회사 측도 미개간지를 매수함으로써 30만 내지 50만 명의 한국인 실업자를?수용하여 구제할 수 있다고 계획하였다. 구체적인 운동자금까지 제시한 이러한 계획은 만성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의 한국 독립운동가 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스에나가 미사오는 1918년 8월 당시 하얼빈 아시아 통신사 사장으로 있었다.
 1920년 4월10일 동아일보 3면 사회 ‘고사연구회 해산’
 1921년 12월15일 동아일보 2면 사회 ‘대풍수전공사 발기’
 1923년 10월28일 동아일보 기사 ‘鄭安立 泣告 祖國同胞書’
 1925년 4월21일 동아일보 2면 사회 ‘龍山署活動 陰謀事件發覺’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42권 중국동북지역편 Ⅳ >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Ⅳ >권도상,보상 구류사건에 대한 회신의 건 (24) 내전 제385호 大正八年(1919) 12月20日 午後6時00分,  奉天發 二十一日 午前八時一五分 本省着 赤塚總領事, 內田外務大臣, 貴電第一九六號ニ關シ (極秘) 權道相及權輔相兄弟ハ先頃當地支那監獄ニ拘禁中ナリシ處交涉ノ結果同時ニ逮捕セラレタル他ノ七名ト共ニ一昨十八日釋放セラレ權兄弟ハ昨日朝歸國ノ途ニ就ケリ鄭安立ハ一時釋放セラレタルモ支那官憲ハ再ヒ彼ヲ逮捕シ目下秘密裡ニ取調中ナル趣ナル處鄭ハ歸化鮮人ナルヲ以テ之カ取還シニ多少ノ困難ヲ見ルヘシト思考ス. 右鮮人拘禁ノ理由ハ支那側ノ謂フ所ヲ聞クニ彼等鮮人ハ?ニ吉奉問題紛糾ノ際高士賓ト結ヒタル馬賊ノ頭目金鼎臣及高士賓ノ舊部下等ト通諜シ東三省ノ獨立ヲ企劃シ治安ヲ紊ルノ虞アリシニ由ルト云フニアル處右東三省獨立ノ陰謀ハ權兄弟カ直接本官ニ語ル所ニ依レハ事實ニシテ末永節ヲ初メ在東京內田良平其他多數ノ浪人之ニ關聯シ居ル趣ニテ又本莊浪衛ノ內話スル所ニ依レハ該陰謀ニハ我政府部內ニモ贊成者アル趣ニテ運動資金ハ政友會ヨリ出テ居ルトノコトナリ陰謀ノ動機ハ朝鮮ノ獨立ヲ東三省ニ轉換スルノ目的ヲ以テ鮮人ノ爲東三省?露領西比利ノ一部ニ獨立國ヲ建設スト云フニアリテ露國人ノ一部モ此運動ニ贊意ヲ表シ居レリト云フ尙鄭安立ハ此ノ陰謀ノ首腦者ニシテ?ニ朝鮮官憲ヲ驚カシタル義和官卽チ李堈公誘拐事件モ之ニ關聯シ當時鄭等ハ同公ヲ推シテ右獨立運動ノ人氣ヲ集ムル計劃ヲ立テ李堈ヲ迎フル爲安東ニ向フ途中支那側ニ逮捕セラレタルモノナリト云フ尙本官ハ近日中張作霖ニ懇談ノ上鄭安立ヲ借受ケ詳細內容ヲ聽取リタル上更ニ詳報スヘシ (續ク)  권도상 권보상 형제가 중국(지나) 감옥에 구금된 이유는 길봉문제(吉奉問題)인데 고사빈(高士賓)의 옛 부하와 마적두목 김정신(金鼎臣)을 결속시켜서 동삼성 독립을 기획한 것이다. 여기에는 스에나가 미사오(末永節)과 동경에 사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기타 다수의 낭인(浪人)이 관련되어 있다. 일본정부내에서도 찬성자가 있으며, 운동자금은 정우회(政友會)에서 나온다. 이러한 음모의 동기는 조선의 독립을 동삼성으로 전환시켜서 조선인으로 동삼성과 시베리아 일부에 독립국을 건설한다는데 러시아인 일부도 이러한 운동에 찬성을 표시하였다. 오히려 정안립이 이 음모의 수뇌자로 전에 조선관리를 놀라게 했던 의친왕의 망명미수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정안립은 의친왕을 추대하여 독립운동의 인기를 결집시킬 계획으로 의친왕을 환영하기 위해 안뚱으로 향하는 도중에 중국(지나) 관헌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본관리는 근일중 장작림을 면담하고 정안립과 주고 받은 상세내용을 듣고 보고하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권희목(1891~1930); 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권상하(權尙夏)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도상(權道相)이다. 공화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어 전개된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나라 안팎에서 여러 개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울에서는 3·1 운동의 감동 속에서 한성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4월2일 권희목(權熙穆)은 이규갑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인천의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국민 대회를 열어 한성 임시 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그해 4월7일 밤, 안국동에 있는 박이근(朴理根)의 집에서 박이근, 허익환 등과 함께 ‘조선민국임시정부조직포고문’과 ‘도령부령(都領府令)’ 제1,2호 2,000여 장을 인쇄하여 서울 시내 요소에 배포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당시 권희목은 천도교가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고 보고 천도교와는 별개의 정부조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형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문연구소, 두산백과/언어>한국어
 네이버 지식백과, 동아부인상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종합/기관/단체>경제
 1925년 11월21일 동아일보 2면 사회 ‘수상한 鄭安立’
 김도훈: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역사공간, 2010. 116쪽
 1927년 7월14일 동아일보 2면 사회 ‘鄭安立 被逮’
 1927년 3월13일 동아일보 2면 사회  ‘세계를 개조하고 연방자치를 운동’
 1927년 7월16일 동아일보 2면 사회  ‘세계연방---- 자유연맹 조직’
 일본 세력이 배후에서 그 독립국을 조종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 다가오는 공산주의의 파도와 중국의 항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대를 형성하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의 간도는 백두산을 수원으로 하는 두만강과 해란하가 합류하는 지역의 총칭
 한일합방을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연대나 연합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일진회 회원들은, 한일합방이 결과적으로 일본 측의 일방적인 식민지 병합 형식으로 끝난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 일진회원들은 1920년 5월에 주도자였던 스기야마 시게마르(杉山茂丸)에게 한국 식민 지배에 책임을 묻고 자결을 요구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 사태에 당황한 흑룡회 측에서는 스기야마 시게마르(杉山茂丸)의 부하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내세워 1920년 7월 경성에서 전 일진회원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를 촉구하였다. 나아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은 일진회측에 대한 회유책으로 同光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스에나가 미사오(末永節)는 일본의 대표적 우익단체인 玄洋社에 속하며, 특히 '支那處理案'을 주창한 중국 문제 전문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만주 내의 한국인 한국인 거류 지역을 중립지대로 만들려는 계획안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스에나가 미사오(末永節)는 1922년 일본에서 남북만주 및 내외몽고를 총괄하고, 이것으로 세계적 중립 국토를 조립할 목적으로 肇國會(조국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肇國會(조국회)는 '대고려국'의 실현을 지향한 일본측의 지원단체였다. 실제로 조국회에는 이누카이 츠요시 등 거물급 인사들이 많았으며, 스에나가 미사오(末永節)는 그들로부터 대대적인 협찬을 얻을 수 있었다.
 대고려국의 7개조로 된 건국규약(헌법초안)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제 4조는 공자의 교를 따른다는 것이다.?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통치로 신제도가 도입되어 유림들은 사회적 역할과 특권적 지위 등을 송두리째 빼앗겼기 때문에 일본 측에 반감을 느끼고 배일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조선에서 지도적인 존재였던 유림이 다시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대고려국에서는 유교를 국교로 제안하였다.
 네이버 블로그: 스에나가 미사오, 곤도세이쿄 04-봉황의 나라 대고려국, 2009년 2월15일.
 이회영의 오기인 듯함.
 안정근이나 안공근의 오기인 듯함

VI. 의친왕(義親王) 망명 미수사건(朝鮮民族大同團 사건)
 압록강 철교는 1909년 5월 조선통감부 철도국에서 착공하여 1911년 11월에 준공되었다. 철교의 중앙에는 단선철로가 부설되어 있고 양쪽에 인도가 설치되었으며, 길이는 944m이다.1) 1919년 11월 의친왕은 압록강 철교를 건너 안뚱(安東)역까지 갔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망명계획이 실패하였다. 이 때 의친왕은 상복차림으로 발견되었는데 정안립도 상복차림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2) 의친왕 망명과정에서 정안립의 조언이 있었다.3)

 이륭양행의 조지 엘 쇼우(George L. Show)가 한국인의 독립투쟁을 은밀하게 지원하였다. 1919년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결에 따라 교통부령이 발표되었는데 이륭양행 2층에 교통국을 설치하여 극비리에 활동을 시작하였다.4)|

 안뚱시 칠도구에는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에서 이주한 김재엽이 경영하던 비현 정미소가 있었다. 비현 정미소는 평범한 방앗간이었지만, 대한독립단, 광복군사령부, 대한청년단 등의 은신처이자 무기를 보관하고 전달하는 비밀 연락기지였으며 상하이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자금의 보관처였다.5)

 양기탁과 정안립은 만주에 고려국을 세울 목적으로 국내의 고종황제나 의친왕 혹은 영친왕의 망명을 꾀하였다.6) 낌새를 챈 일제는 텐진에 있는 양기탁을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다.

이회영이 입국하여 고종황제의 망명을 허락받았으나, 고종황제(가 갑자기 독살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민족대동단 사건 이전에도 의친왕은 몇 차례나 망명을 결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전협은 의친왕을 망명시키기 위하여 특급요원인 이을규와 정남용을 시켜 의친왕을 이륭양행7)으로 모셔오도록 하였으나, 안뚱역에서 의친왕이 체포되어 실패하였다.8) 그 후에도 의친왕의 망명을 위하여 대동단의 이대정9)스님, 대한독립단의 김기한 등이 활동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 조선민족대동단장 전협
 조선민족대동단단장인 전협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어 연구하기가 힘들다. “의친왕 이강”을 쓴 소설가 박종윤에 의하면 의친왕은 전협과 1905년 경 부터 사동궁을 드나들며 교류하였다고 한다.10) 전협은 의친왕의 심복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사주전을 만들다가 발각이 되었으며, 1908년 윤치호의 부평일대 공한지를 사취하였다가 1912년 구속되어 1914년 석방된 전력이 있다. 전협은 친일단체인 일진회11)에 관여하였고 한일합방 청원서에 세 번째로 이름이 올라갔다고 한다.


 이용구는 23세 때 동학에 입도하여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와 함께 동학혁명 중심에 섰었다. 이용구는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할 정도로 손병희의 심복이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이용구는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하여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처음에는  민회의 이름을 대동회라고 하였으나, 7월에는 중립회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중립회의 목적이 동학혁명 때와 비슷한 것을 알고, 중립회 설립 자체를 임의로 무효화 하고 전국에 진보회의 지회를 설립하였다. 이용구는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송병준의 권고를 받아 진보회를 일진회와 합병하여 손병희의 뜻을 배신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인 1905년 손병희가 귀국하여 반일 사상의 천도교를 설립하고 대고천하하자, 이용구는 친일사상의 시천교를 창설하였다. 손병희는 진보회에 대하여 몇 차례 회유를 하였으나, 이용구가 듣지 않자, 이용구 외 62명에게 출교를 선포하였다.

이 결과로 동학교단을 재건하여 민회를 설립하고 정부를 혁신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손병희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으나, 출교 1년도 안되어 이용구를 따랐던 교인의 과반수가 다시 돌아와 교세를 되찾게 되었다.12) 이 때 전협도 최익환과 같이 일진회에서 천도교로 돌아온 것 같으며, 손병희가 의친왕에게 전협을 소개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이용구는 일진회 총 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기 12일 전에  '외교권을 일본에게 이양할 것'을 촉구한 선언서나, 1909년 12월 임시총회를 개최해 '대한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이 직접 통치할 것'을 결의한 선언서를 고종황제와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 아라스케통감 등에게 올렸다. 

  조선민족대동단은 전협13)이 최익환14) 등과 조직한 단체이다. 전협은 1918년 여름부터 활동하였다. 이것은 지린에 있는 정안립의 동삼성한족생계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15)16) 월정사 승려 이종욱은 안창호17)의 지시로 국내로 잠입하여 전협과 안창호 사이를 오가며 의친왕 망명 작전을 진행하였으며, 먼저 김가진의 망명에 성공하였다.18)
 

 전협 일행은 언제 변심할지 모르는 총독부 직원 정운복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공평동에 있는 첫 번째 비밀가옥에서 구기동에 있는 두 번째 비밀가옥19)으로 이동하였다. 24살의 나창헌은 육혈포를 들고 의친왕을 호위하였고, 인력거꾼에게 사정해 인력거꾼으로 위장하는 등 의친왕 망명은 긴장 속에 신속하게 진행되었다.20) 나창헌은 의친왕 망명 미수사건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과 내무차장 겸 경무국장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나창헌은 박용만을 만난 후 철혈단 단장을 맡았는데, 박용만의 배후에는 김규흥과 정안립이 있었다.

   봉오동에 있는 최진동은 1919년 11월 11일 의친왕이 이륭양행에 온다는 소식을 정안립21)을 통해서 듣고 서로군정서를 통하여 이륭양행에 도착하였다.22) 최진동은 의친왕이 안뚱역에서 체포되어 만나지도 못했으면서 의친왕과 무력독립운동을 결의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이륭양행에는 동삼성한족생계회23) 간부들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최진동에게 무력 항일투쟁을 지시하였다. 1924년 최진동이 일본인 아나키스트(Anarchist)들과 연락하여 40여명의 결사대를 도꾜(東京)에 잠입시킬 계획을 추진한 것24)을 보면 의친왕, 최진동, 아나키스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機密公信 第一五號에 따르면 ‘1920년 1월1일에 일송정(동북방십리)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할 목적으로 윤동철등 28명이 모여서 부흥회혹은 복황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정회부장에 황병길, 급진단 25) 단장에 그레고리 박, 신민단 단장에 오병묵, 복황단 단장 장봉한이며, 급진단은 폭탄투하와 조선침입을 연구하고 신민단은 감리교 신자를 중심으로 행동하고, 복황단은 장로교 신자를 중심으로 기부금 모집 등을 결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안뚱에 다녀온 최진동이 주도하였다고 추측된다.26)

 전협은 재판에서 일제의 수사망에 혼선을 주려고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27)28)
망명에 관여하였다는 느낌을 준다.

 

 


각주)-----------------
 최범산: 압록강 아리랑, 최범산의 항일 유적 답사기, 도서출판 달과소, 2012. 18쪽
 정순택: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56쪽-64쪽
 1919년 10월3일 발신한  ‘機密公 제 58호 불령단 관계 잡건 ?조선인의 部 ?재만주의 部 12 鮮人 비밀집회 상황보고의 건’ 발신자: 森田寬藏(길림총영사), 수신자: 內田康哉(외무대신)
 최범산: 압록강 아리랑, 최범산의 항일 유적 답사기, 도서출판 달과소, 2012. 24-34쪽
 최범산: 압록강 아리랑, 최범산의 항일 유적 답사기, 도서출판 달과소, 2012. 51쪽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 >예심괘판사신문조서 >李達河 신문조서 문: 그에 대하여 피고는 ‘지금의 독립운동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헛되이 민심을 불안케 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독립운동은 반드시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통일하려면 이조의 복벽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며 피고는 어디까지나 이조의 복벽을 주장하였다는데, 어떠한가? 답: 그것은 내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全協이 주장한 것이다. 그가 말한 爲義帝發喪主義라는 것이 즉 복벽을 말하는 것이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部-재만주의 部 15 > 이륭양행 관계에 관한 건,  高警 제5328호 발신자 京畿道 警察部長, 수신자 齋藤實(朝鮮總督) 발신일 1920년 2월27일
 정순택: 선각자 정안립, 예술의 숲, 2010.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100쪽
 박종윤: 의친왕 이강(장편소설), 2009. 17쪽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 > 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 全協 신문조서(제1회)  주소는 중국 奉天省 海龍縣 山城子 大荒溝. 9년 전  全國煥이란 이름으로 사기취재죄에 의해 징역 3년의 처형을 받았다가 明治 폐하 붕어 때 감형되어 2년 4개월의 實役을 치르고 방면되었다. 明治 37년(1904년) 일진회원이 되어 평의원 및 총무원 등을 지냈으며, 明治 38년(1905년) 경기도 부평군수를 拜命, 3년만에 사직하였다.
 손윤: 긴급명령, 국부 손병희를 살려내라, 에디터, 2012. 99쪽-102쪽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 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 全協 신문조서(제1회) 가족은 3년 전 겨울 柳河縣에서 지금의 주소로 옮겨, 가사는 전적으로 사위가 취급토록 하고 나는 奉天 방면에 많이 있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공판시말서 >공판시말서(一) 피고 全協에게 문: 출옥 후 처음  崔益煥과 만난 것은 언제였는가? 답: 大正 7년(1918년) 봄경  경성 남대문통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 해 여름 무렵 崔益煥이 피고의 집에서 동거하기에 이르렀다. 문: 피고가  만주 및 上海 방면을 돌아다니다 온 것은 언제인가? 답: 崔益煥과 우연히 만나기 전 만주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는 가족들이 만주에 있기 때문이었고, 崔益煥과 해후한 후 大正 7년(1918년) 겨울 만주 및 上海에 갔다 왔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예심괘판사신문조서> 鄭斗和 신문조서 문: 피고는 全協을 언제부터 알고 있는가? 답: 大正 7년(1918년) 여름 무렵, 金鳳濟라는 나의 한문선생이 黃金町 4丁目 靑橋 부근의 韓이라는 사람 집에 묵고 있었으므로 그 선생을 방문했다가 마침 그곳에 全協이 와 있었으므로 金선생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문: 그때  全協과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가? 답: 서로 주소 등을 물었을 뿐이고, 특별히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때  全協은 만주 奉天에 있다고 하였다.
 국사관논총 제15집 >국민회를 논년함(박창욱)>III. 간도반일민족운동에서의 국민회의 역사작용. 국민회는 또 각종 途徑과 형식을 이용하여 군중들을 조직하여 반일운동에 궐기시켰다. 1919년 5월, 上海에서 대동단이 건립되자, 간도의 일부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대동단 조직을 결성하려 할 때 국민회에서는 이를 적극 지지하여 나서 具春先 본인이 대동단 간도본부단장을 겸임하고 군중들을 반일에로 동원하였다.
 일제 경찰에는 안창호로 진술했지만 실제로는 정안립의 지시였다. 이종욱은 한성임시정부에 관여하였는데 정안립과 관계된 권희목, 이규갑 등도 한성임시정부에 관계되었다.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54쪽-72쪽
 북한산 구기매표소 부근, 최성호의 집
 신복룡: 대동단 실기, 도서출판 선인, 2003. 139쪽-154쪽
 일제가 1919년 10월3일 발신한  ‘機密公 제 58호 불령단 관계 잡건?조선인의 부(部) ?재만주의 부(部)12  선인(鮮人) 비밀집회 상황보고의 건’ ‘정안립(鄭安立) 등 제1차 비밀회의 개최, 정안립(鄭安立) 등 한국, 중국, 러시아(華俄鮮)의 연합독립국 건설논의, 정안립(鄭安立)의 중국, 러시아, 한인 대표로 의친왕(義親王) 추대, 정안립(鄭安立)의 3.1운동 공박, 정안립(鄭安立) 등의 중한연합 수뇌회 개최 결의, 정안립(鄭安立) 등의 마적 두목 초청 결의, 정안립(鄭安立) 등의 임시연합군정부 설립 결의, 정안립(鄭安立) 등의 의친왕(義親王) 호송 결의, 정안립(鄭安立) 등의 비밀회의 기록장부를 오가와(小川) 서장에게 대여‘ 정안립은 1919년 10월3일 이후 의친왕의 호송을 위하여 최진동을 안뚱 이륭양행으로 오도록 하였다. 최진동이 서로군정서를 거쳐온 것을 보면 서로군정서에서도 의친왕의 호송을 위해 누군가를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동삼성한족연합회와 서로군정서에서 의친왕의 호송을 준비하였다.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최진동 장군, 흑룡강 조선 민족 출판사, 2006. 71쪽-82쪽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部-재만주의 部 14 > 권형제 구금에 관한 귀전에 관해, 제 385호 발신자 赤塚正助(奉天總領事),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발신일 1919년 12월04일,  權道相, 權輔相형제 지나 감옥 구금중 鄭安立 일시석방, 동삼성 독립기도, 정우회에서 운동자금, 조선인을 위한 독립국 건설, 이강공 유괴사건 당시 정 등은 이강공을 환영하기 위하여 안뚱(安東)으로 가다가 지나측에 체포되어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최진동 장군, 흑룡강 조선 민족 출판사, 2006. 220쪽
 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 제1장 초기 한인 이민 사회의 형성(1860~1919)>?국권피탈과 만주 한인사회>?북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  급진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조직되었으며, 노령의 과격파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42권 중국동북지역편 Ⅳ> 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Ⅳ> 排日結社復皇會ニ關スル件 (101) 機密公信 제15호
27)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 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 全協 신문조서(제3회)
   문: 전하를 모시려던 목적지는 정말  上海였는가? 답: 그렇다.  上海에는 宋世浩가 왕래하며 연락하고 있었는데, 그 밖에는 우리 대동단으로서는 연락기관은 없었던 것이다. 다른 단체인 국민대회에는 鮮于爀이 安東縣에 있어 上海는 물론 미국, 기타의 해외 동지들과 통신 연락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들었으나, 우리쪽에서는 실제 확실한 연락은 없었던 것이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 검찰조서> 全協 조서(제2회) 문: 그대는 그 가정부 조직의 취지에 찬성하는가? 답: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 문: 그대들은  李堈을 上海로 연행하여 가정부의 수령으로 해두고 조선인의 인심을 수람하여 조선독립을 도모할 생각이었는가? 답: 그렇지는 않다.  가정부와는 별도로 金嘉鎭, 李堈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운동기관을 설치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내의 조선인의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조선독립을 도모할 작정이었다.

2) 최익환
  최익환의 부친은 동학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옥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대문 형무소 옥문 앞에서 순종하였다. 혁명가의 가정에서 출생한 최익환은 강직하고 투지가 강할 뿐만 아니라 기골도 장대하였다.

최익환은 모 기관에 재직중 공금을 혁명운동의 자금으로 돌린 관계로 3년의 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이웃 감방에 있던 전협을 알게 되었다. 전협은 서울 출생으로 부천군수로 있다가 일진회의 평의회 의장으로 있을 때에 운동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150만원의 돈을 사주하고 투옥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가 의기 상통하여 출옥 후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같이 일할 것을 굳게 언약하였다.

두 사람은 출옥하자 약속대로 서간도를 거쳐 만주1)2)를 전전하다가3) 상하이로 임시정부를 찾아 가 당시 경무국장이었던 김중호, 김원일 등을 만났다. 1919년 2월4)에 상하이에서 서울로 잠입하여 대동단이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총재로 상하이에 있는 김가진을 추대하고 단장에 전협을, 그리고 자신은 총무가 되었다.

권태석으로 부터 300원의 자금을 얻어 김주환, 김봉석을 상해에 밀파하여 대동단 본부를 상해에 두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대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할 것을 임정의 국무총리인 안창호와 의논했다. 임정에서는 이종욱을 급파하여 협력하기로 하였다. 김가진은 의친왕의 서울 탈출을 요망하는 동시에 의친왕비의 아우인 김춘기까지도 탈출하여 줄 것을 바라는 서신을 냈다. 최익환)5)은 신복룡 교수의 장인이다.


3)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6)
 이을규와 이정규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밀명으로 서울에 잠입하여 의친왕 망명을 꾸미는 것과 1922년 이을규가 베이징에 있는 이회영을 찾아가서 아나키스트가 되게 하는 것, 그리고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 혈사”에서 전협과 최익환의 행적을 기록한 것7)을 보면 조선민족대동단의 배후는 신규식8), 안창호, 김규흥, 이회영으로 보지만, 실질적인 배후는 정안립, 양기탁이다.

 이을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송달된 선전물을 배포하면서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으며, 정남용, 이재호 등과 함께 의친왕을 상하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을규는 인천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 농공은행 의주지점에 근무하게 되었다. 1918년 평안 농공은행 의주지점을 그만두고 압록강 건너 안뚱에서 박광9)의 도움으로 간성덕10) 및 동신공사 라는 무역상11)을 차리고, 국내외 동지 간에 연락과 자금조달을 해주고 있었다.12) 1919년 9월말 임시정부는 안뚱과 서울간 비밀통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강태동, 김한,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을 국내로 잠입시켰다.

그런데 이들이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강태동과 이을규 에게는 의친왕 망명공작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이을규는 의친왕을 모시고 수색역에서 안뚱역까지 갔으나, 안뚱역에서 의친왕이 정남용과 같이 체포되는 바람에 이을규는 의친왕의 돈가방을 가지고 2Km 떨어진 이륭양행13)으로 피신하였다.

이 당시 이정규는 종로 화신 옆에 있는 한창 양화점(보금장시계점)을 연락장소로 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하였다. 교통국원 김기준14)이 서울을 내왕하면서 상하이에서 들여오는 ‘독립신문’, ‘신대한’ 등의 인쇄물 전달과 서신연락을 이정규와 취하고 있었으나, 그 횟수가 잦아지면서 일경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이정규는 이 방식을 중지시키고 서울과 안뚱 간을 격일 내왕하는 인천 출신 여객 전무 우계 전진원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유자명은 전진원의 도움으로 철도 안내원으로 변장하고 신의주 국경선을 넘나들며 임시정부 비밀 문건을 반입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정규는 1920년 11월 이을규15)가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1년 동안 강태동, 김한, 이기만, 양기탁16), 이종욱, 유자명, 이종락, 정화암 등 각계각층의 인사와 접촉하고 있었다.17)

 이을규가 이륭양행18)에 맡겨놓은 고종황제의 상하이 독일은행 25만불의 예금증서는 이을규가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안뚱에서 4일 동안 항해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여 독일은행에서 고종황제)의 비자금을 찾았으며, 이것을 독립운동거점지에 전달했던 것 같다.19) 이을규20)는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양기탁, 강태동, 이정규 등과 연통제 공작을 하다가 1920년 1월 체포되었다.
 
 이정규21)는 이동휘의 ‘구국의 길은 오직 교육에 있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신식교육을 받기로 결심하고 1914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마치고 1916년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예과에 입학하였다. 이정규)는 1919년 도쿄에서 독립선언문과 일본 조야에 보내는 통고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고 독립운동에 관한 선전 자료를 수집하여 파리(Paris)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간 김규식에게 보내는 일을 하였다.

4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6월 상하이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콜레라에 감염되어 40여 일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9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의친왕의 망명계획에 참여하여 서울과 상하이를 연결하는 교통망을 설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환영사건으로 예비 검속되어 10여 일 간 투옥되었다.

4) 뚝섬나루터22)와 저자도
 손병희는 1914년 지일기념일에 기념식을 마친 후 한강에서 40여 척의 유람선을 띄워 지방교역자 500여명과 함께 대규모로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으며, 해마다 천일기념일에는 기념식 후 원유회를 열어서 지방에서 올라 온 교인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1915년 7월 동대문 밖 낙산 남쪽 자락에 있는 박영효의 별장을 4만원에 구입하고 ‘상춘원’이라고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주동자들은 박영효의 별장인 압구정에서 모의를 하였는데23),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에서 정변 모의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뱃사공을 죽였다고 한다. 특히 조선민족대동단장 김가진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등과 친밀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압구정은 반란의 진원지로 헐리게 되어 지금은 돌로 된 표지만이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저자도는 고려말 한종유의 소유였으나, 조선개국과 함께 왕실재산으로 귀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저자도에서 지냈으며, 종묘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자도에서 채취하여 옥수동 빙고골에 저장하였다. 세종대왕은 둘째 딸인 정의공주에게 저자도를 하사하였다.

세종대왕은 쓰시마 정벌에 출정하는 이종무를 저자도에서 전송하였다. 왕실과 선비들은 저자도에서 연회를 베풀며 시를 지었으며, 한명회)는 저자도의 풍광에 매료되어 압구정을 지었다. 철종때 저자도는 박영효에게 하사되었으며, 갑신정변시 국가에 몰수되었으나, 후에 박영효가 다시 돌려받았다. 저자도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섬전체가 잠기고 유실되어 면적이 줄어들었으며, 1970년대 저자도의 흙을 압구정 택지 조성사업에 사용하면서 저자도가 사라졌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경 한강에서 뱃놀이를 가장하여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24)되었다.
여기서 천도교의 한강 뱃놀이와 조선민족대동단의 한강 뱃놀이가 유사성이 있다. 그런데 의친왕의 4녀 이해숙의 생모인 박영희의 집안이 뚝섬나루터라는 사실25)에서 조선민족대동단이 뚝섬나루터에서 의친왕이 즐겨하는 기생 잔치를 가장하여 결성되었으며, 이해숙이 1920년 4월 28일생인 것을 보면 의친왕은 1919년 3.1운동 직후인 조선민족대동단 결성 시에 뚝섬나루터의 박영희와 관련이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한강의 번화한 다섯 곳의 나루는 뚝섬, 노량, 용산, 마포, 양화나루인데 이것을 오강나루라고 한다.26) 

 의친왕은 박영희에게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한국전쟁 때 박영희를 사동궁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27) 아마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뚝섬나루터 박영희 집안이 의친왕을 도와준 것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각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국한문)>?崔益煥 신문조서(제1회)  4년 쯤 전(1915년 경)부터 겸업으로 隱元豆의 중매를 위해 중국 하르빈 혹은 小綏芬을 왕복하고 있었다. 大正 7년(1918년) 3월경부터 경성에 거주를 정하였다. ---최익환이 이범윤과 접촉한 흔적이 보인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국한문)> 崔益煥 신문조서(제2회) 小綏芬을 목적하여 갔던 것은 그곳에 아는 사람인 강원도인 朱鎭洙가 있었기 때문으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 > 공판시말서> 공판시말서(一) (피고 崔益煥에게) 문: 相被告  全協과는 전부터 친한 사이인가? 답: 17-8년 전부터(1903-4년경) 잘 알고 지냈다. 문: 피고가 출옥한 후 처음 全協을 만난 것은 언제인가? 답: 大正 7년(1918년) 여름 무렵 오랜만에  남대문통에서 全協을 만나 주소를 물었더니 동대문 안 효제동에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얼마 안 있다가 그 집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3일 설립되었으므로 이때는 임시정부가 없었다. 전협과 최익환은 일제의 수사망에 혼선을 주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진술하였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 > 예심괘판사신문조서> 崔益煥 신문조서(제2회) 문: 그 후 어떻게 하였는가? 답: 그 후 세무주사가 되어  충청남도 석성, 서천, 서산의 세무분서에 근무하였는데, 明治 41-2년경(1908-9년경) 官의 돈을 소비하여 공주지방법원에서 처벌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다가 大正 3년(1914년) 9월에 출옥하였으며, 그 후 잠시 경성에 있다가 大正 6년(1917년) 북만주의 吉林省 東寧縣 東淸鐵道 沿線인 小綏芬에 가 1년 쯤 농업과 상업을 경영하였고, 大正 7년 1월에 京城으로 돌아와 그 뒤로는 경성에서 살고 있다. 문: 全協을 아는가? 답: 그는  일진회 총무였기 때문에 내가 그 회에서 경영하는 광무학교에 재학하던 중에는 자연히 그 집에 출입하여 그때부터 아는 사람이다. 문: 피고는 언제부터  全協의 집에 있었는가? 답: 大正 7년(1918년) 여름 쯤  경성 동대문통 노상에서 5년만에 全協과 만나 가끔 그의 집으로 놀러 가게 되었고, 함께 만주에 가기로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 해 9월인가 10월경 하숙을 걷어치우고 全協의 집에서 동거하였던 것이다. 문: 全協의 가족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답: 가족은  만주에 있으며, 내가 全協의 집에 갔을 때에는 그는 소실 卞榮和와 함께 동대문 안 효제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大正 8년(1919년) 1-2월경 봉익동으로 이사하였던 것으로, 가족으로는 소실 외에 하인이 한 사람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그것 때문에  金鳳陽, 金用煥(정안립과 관련된 인물인 듯 하다.)이 全協의 집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金鳳陽은 4-5회 全協을 찾아온 일이 있으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며, 金用煥이란 사람은 알지 못하므로 왔었는지 안 왔었는지 모르겠다. 문: 그때 피고는 權泰錫에게 자기가 맡은 일은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대동단으로, 본부는 중국 吉林省에 있는데 이번에 京城에 지부를 설치하기로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각 단체가 개별적으로 활동해 오던 것을 일괄해서 활동하는 단체로서 上海 및 미국에 있는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조선독립에 대하여 인쇄물을 출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답: 그처럼 자세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大同團은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라는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문: 이 인쇄물에는 황족 대표를 두도록 되어 있는데 누구를 그 대표로 할 생각이었는가? 답: 나는  李王을 대표로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 그 방면의 일은 全協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의 역량 여하에 따라 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정해질 것이었으므로 누구라고 하는 짐작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 李堈公을 그 대표로 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답: 내게는 그런 생각은 없었다.
 이정식, 김학준,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김성숙, 장건상, 정화암, 이강훈의 독립투쟁 , (주)민음사, 1988. 329쪽
 박은식,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330쪽-334쪽
 이정규: 우관문존,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 126쪽, 상해방면에는 한말 고종제의 밀사로 민영익이 파견되고 뒤이어 5조약의 보호조약과 아울러 외교권이 박탈당하게 되니 서구에 파견되어 있던 현상건 등 외교사절이 상해로 모였고 뒤이어 창강 김택영이 남통주로 오고 박은식, 신규식이 상해로 왔다. 민영익, 현상건 등의 인물도 연로와 아울러 시세변천에 따라 운동선에서 멀어지고 신규식이 운동의 대표로서 중화혁명 정계의 인물인 진기미, 손문 등 인사들과 관련을 가져왔으며 뒤따라 김규식, 신채호도 왔다.
 호는 남정(南丁)
 이정규: 우관문존,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 127쪽. 149쪽 만주 안뚱(安東)현에 박광과 이을규를 중심으로 간성덕과 동신공사 같은 무역상 물산객주(위탁매매업)를 차리고 동지들의 내왕과 금전거래의 기관적 역할을 하였다. 펑텐(奉天)에서는 이해천 씨를 중심으로 해천양행을 설립하였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 6권 대동단사건 Ⅱ >공판시말서 >공판시말서(一) 피고 李乙奎에게 문: 安東縣에는 언제부터 거주하였는가? 답: 大正 7년(1918년) 8월부터  安東縣에서 곡물상을 하고 있다. 문: 피고는  鮮于爀과 자주 만난 일이 있는가? 답: 安東縣에서 처음 만났다. 문: 姜錫龍(강태동)과는 언제부터 친한 사이인가? 답: 작년(1919년) 7월 말경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2015년2월7일 이문창 증언
 이정식, 김학준,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김성숙, 장건상, 정화암, 이강훈의 독립투쟁 , (주)민음사, 1988. 201쪽
 교통부 교통국 초대국장 홍성익, 교통국원 김기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42권 중국동북지역편 Ⅳ> 중국동북지역민족운동 Ⅳ> 怡隆洋行關係ニ關スル件 (135) 高警 제5328호 大正9年(1920년) 2月27日 임시정부안동교통사무국장 홍성익(洪成益)과 이을규(李乙圭) 체포기록
 이정규: 우관문존,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 151쪽. 독립운동 사화, 이정규는 강태동, 이기만, 양기탁과 안뚱교통국을 연통제로 결합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양기탁은 비밀조직의 노출을 꺼려하여 연통제를 반대하였다.
 이문창: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 이학사, 2008. 51쪽-53쪽
 이정규: 우관문존,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 150쪽. 독립운동 사화, 당시 중국 안동 세관에는 한인 미국유학생 정윤교, 장건상이 있었고, 그들이 간성덕과 동신공사를 경영하는 박광, 이을규와 친한 사이여서 이륭양행 주인이며 영국 명예영사 쇼씨와 관련이 생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륭양행이 상하이와 안뚱간의 정기항로를 가지고 하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기선회사 지점이며 대영제국의 치외법권이 미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기미년 초부터 이륭양행은 독립운동자들의 교통기관이 되었고, 안뚱 구시가에 있는 간성덕은 중계기관이 되었다.
 신복룡: 대동단 실기, 도서출판 선인, 2003. 154쪽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 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 宋世浩 신문조서(제2회): 이달 1일경이었다고 생각되는데, 李乙圭를 만났을 때 그는 말하기를 종래에 安東縣과 上海가정부 사이의 연락은 鮮于爀이 주선했으나, 그는 현재 上海에 있으므로 지금은 자기가 그 뒤를 이어받아 연락을 지속하고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리고나서 3-4일 후 黃金町 4丁目 李在浩의 집으로 鄭南用을 방문했을 때 그는 부재이고 王世俊(羅昌憲)이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李乙圭가 安東縣과 上海假政府의 연락기관인 것을 알게 되었으나, 별로 협의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정규: 우관문존,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 7쪽-15쪽
 의친왕의 4녀 이해숙의 생모인 박영희(朴英喜)의 친정주소.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2가 449번지
 김옥균과 박영효의 집, 동대문 밖 탑골승방, 박영효 별장인 압구정변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갑신정변 회고록,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6. 23쪽
 신복룡: 대동단 실기, 도서출판 선인, 2003. 62쪽
 이해준: 황실학논총 제 13호, 의친왕 망명 미수사건과 봉오동 전투의 고찰, 한국황실학회, 2012. 121쪽 
 손종흠: 한강에 배 띄워라, 굽이굽이 사연일세, 도서출판 인이레(주), 2011. 83쪽
 이숙경(이학진과 이해숙의 딸) 증언

각주)-----------------

5) 김경천
 1919년 6월 최초의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김경천은 명월관 기생으로 의친왕의 애첩인 현계옥과 염문이 났다는 소문1)을 퍼뜨리고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2) 이러한 이야기는 의친왕이 명월관을 매개로 하여 김경천과 이청천의 망명에 관여하였다는 느낌을 준다.

6) 지암 이종욱 스님3)
 조선민족대동단 연루자로서 사건당시 일제에 체포되지 않은 사람은 네 사람4)으로 이종욱, 이을규, 나창헌, 김중옥이며, 이을규는 안뚱에서 의친왕의 가방을 가지고 이륭양행으로 도주하여 상하이로 갔으며, 재차 입국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종욱은 월정사 출신 승려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연통제 요원으로 임정과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었던 인물로 의친왕 망명미수사건 직전 상하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체포를 모면하였다. 이종욱은 이탁이 중심이 되어 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체인 27결사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27결사대는 을사오적과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황제의 양위를 강요한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법무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등 이른바 7적을 암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7결사대는 1919년 3월3일 고종황제의 국장일에 거사를 계획하고 망우리 고개에서 기다렸으나 역적들의 위치가 순종황제가 탄 어가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황제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종욱은 4월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박한영과 함께 불교계의 대표로 한성임시정부5)의 발족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부 참사로 임정 활동에 참가하였다. 이종욱은 1919년 5월경에 상하이로부터 국내로 돌아와 조용주, 연병호, 송세호 등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국제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목적으로 성립되었다. 1920년 2월말 이종욱은 연통제 실행의 책임을 지고 서울에 들어왔다.6) 1920년 3월 이종욱은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이종욱은 임시정부 내무부 특파원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와 연통제 조직을 위하여 활동하다 8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이종욱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승려로서 연통제조직을 지하화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 후, 조선총독부의 회유로 친일파로 변절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월정사를 구하기 위하여 총독부와 협상하려고 위장 친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종욱이 오대산 석존정골탑묘찬앙회를 조직할 때, 박영효가 회장이 되었으며, 1936년 9월 창덕궁과 이우공도 금일봉을 보냈다고 한다.

 이종욱은 월정사 터전을 잡도록 애를 썼으며, 불교의 불모지인 주문진에 포교하기 위해서 79세에 주문진 동명사를 창건하였다. 지암화상 평전에는 '1944년 강태동, 유석현 등과 함께 무장봉기를 위한 국민동지회를 조직해 유격대 조직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 18일을 거사일로 삼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던 유석현이 1977년 2월 정부에 제출한 ‘공적사항확인서’에는 이종욱이 1924년 함흥감옥에서 출옥 후 8·15 광복 때까지의 유공사항을 적어놓았다. 이 확인서에는 이종욱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상하이로 전달했다는 내용은 물론 1944년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계획까지 담겨져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이종욱은 1944년 강태동, 이응진, 김현국, 유석현 등과 함께 파고다 공원 뒤 송죽원에서 비밀회담을 갖고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할 경우 일본군에 대해 후방교란작전을 펴는 동시에 종전 후에는 교전단체로 인증을 얻어 세계강화회의에 대표를 참석시킬 목적으로 국내에서 무장봉기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7)”고 유석현은 증언하였다.

조계종 종무총장으로 있는 이종욱이 재정책임을 맡고 유석현은 무기를 책임지기로 했으며, 1945년 9월18일을 거사일로 잡았는데, 이범석의 광복군이 본토에 상륙하기로 한 시기와 일치한다.

 ‘초혼문’8)은 1962년 백중에 주문진 동명사에서 이종욱이 백중 천도재 및 위국선열지사 천도재에서 봉독하기 위해 작성하였던 것이다. 당시 79세의 이종욱은 회한에 찬 항일운동을 회고하며 먼저 간 독립운동가들의 천도재를 동명사에서 ‘위국선열초혼 및 백중천도식’이란 이름으로 거행하였다.

가) 안창호 회상
 1919년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서 1921년 3월까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부 참사와 의정원 의원직을 맡아 국내 독립운동조직을 위해 ‘연통제’를 추진하였는데, 당시 내무부 총장으로 ‘연통제’를 구상하였던 안창호가 이종욱에게 국내에 잠입하여 ‘연통제’ 조직을 부탁하는 광경을 회상하면서 안창호를 추모하고 있다. 실제 ‘안창호일기’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말까지 이종욱은 안창호와 7차례 면담한 기록이 있다. 안창호와 이종욱은 상하이에서 수시로 면담하여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그래서 이종욱은 ‘초혼문’에서 가장 먼저 도산을 회상하며 애절한 추모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나) 김가진 회상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한일합방 당시 합방에 동조한 대신이었으나 후일 깊은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 항일운동단체인 ‘대동단’에 참여하였고, 마침내 1919년 10월 임시정부의 권유와 대동단의 결의에 따라 임정요원 이종욱의 안내로 국내를 탈출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다) 김구와 이시영 회상
  백초월과 이종욱은 3.1운동 직후부터 항일운동을 하였다. 이종욱은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는 특파원으로 활동하였고, 백초월은 진관사에서 독립자금과 청년승려를 임시정부에 보내는 활동을 하였다. 백초월은 1919년 6월 대동단 사건시에는 해인사 주지인 이회광에게 조선독립운동 자금 3천원을 기부하도록 하고, 이를 부하 승려 김포광으로 하여금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져가 제공케 하였다.

그리고 백초월은 1919년 6월 김상옥 일파가 조직한 혁신단 사건, 1920년 2월 동경에서 3·1운동 1주년의 기념일을 히비야 공원에서 개최하려한 재도쿄 조선인학생의 만세 소요 사건 등에 관계되는 등 조선독립운동에 분주하여 몇 차례 검거된 인물이었다. 1939년 백초월은 진관사에서 체포되어 1944년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였는데, 1946년 1월3일 김구가 진관사를 이시영, 이종욱과 함께 직접 동행하여 방문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무부 참사였던 이종욱은 내무부 경무국장이던 김구, 재무국장 이시영과 독립운동 동지였다. 이런 까닭에 불교계의 문필가로 널리 알려진 김어수는 ‘불교신문’(1984년 8월1일자)의 한 칼럼에서 “김구가 귀국하여 찾은 사람이 이종욱이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라) 대동단 정남용9)
 정남용은 대동단 총무로 독립운동에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이종욱은 ‘대동단 활동의 동기’에서 대동단 총무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금강산 건봉사 승려 정남용(20대 중반)의 사망 이유가 일경의 몰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대동단 단원이 일망타진된 계기가 한 독립운동가가 밀고했기 때문이며, 이 밀고자는 결국 피를 대량으로 토하고 사망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마) 전진원
 1919년 중반 이종욱이 서울에서 연통제 국내 본부를 조직하면서 대동단, 청년외교단 등과 접촉할 때 상하이 임정과 다양한 연락선을 활용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철도 기관사 전진원이었다.

 전진원은 만주로부터 경의선 철도 기관차를 직접 운전하던 역무원으로 청년외교단원인 동시에 비밀교통국의 연락원이었다. 그는 1919년 중반경 임정의 교통국이 설치된 후, 안뚱 이륭양행과 펑텐 우응규 집에 도착한 임정의 각종 비밀문서, 자료, 물품 등을 서울 만리동 전진원의 집에 던져서 가족들이 받아 이를 이종욱에게 전달하였다.

3.1운동후 상하이 임정은 항일 독립투쟁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의친왕을 모실 계획도 짜고 있었다. 그때 전진원이 승무하는 열차를 의친왕이 탔으면 분명히 압록강을 무사히 넘어 안뚱을 거쳐 상하이까지 갈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세검정에서 하루 더 유숙하므로 인해 전진원의 근무하던 열차를 놓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음 열차에 승차했던 의친왕은 신의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 점도 이종욱의 회고 가운데에 나타나 있다.10)

이종욱은 회고에서 대동단 지도부가 활동하게 된 동기를 왜적들이 기미독립운동하는 동지들을 악평하여 독립운동하는 자들은 조선내에서 제일하류계급들에 망동이요, 상류계급에서는 일본에 동화되어서 추호부동한다고 미영불 기타 각국에 선전하는 고로 전기 양 동지는 적의 이 선전을 봉쇄할 목적으로 왕족 중에서는 의친왕을, 귀족 중에서는 김가진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모셔낼 계획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대동단 지도부가 상하이 임정의 특파원 이종욱에게 탈출 계획의 협조를 구하는 경위와 임정의 협력 내용, 그리고 이종욱이 직접 김가진을 안내하여 상하이로 망명한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1927년 7월30일 동아일보는 “대동단 사건의 강태동씨와 관계된 사실 내용”의 제목으로 강태동의 진술을 기록하고 있다.

 ‘이종욱이 의친왕을 모시고 나갈 계획을 대동단에 부탁하여 전협 일파의 활동이 시작되었을 때 강태동은 베이징에서 나온 김춘기와 역시 의친왕을 모시고 나가고자 여러 가지로 활동하던 중 의친왕께서 없어진 것을 김춘기에게서 듣고 초조히 지내던 중 이재호가 찾아와서 비로소 세검정에 계신 것을 안 것이고, 송세호를 미행한 일은 없었으며, 세검정에 가 본 결과 전협은 전에 감옥에서 서로 면식이 있던 사람으로, 한 방에서 시세를 논의하고, 의친왕의 출발시기가 적당한 지 부적당한 지의 여부와 성공키 어려움을 의논하고 이튿날 오후 2시쯤에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김태석이가 강태동의 집을 찾아가 만난 일은 없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쌍방의 주장이 강경하여 육혈포를 가슴에 대인 일은 있었으나, 결박이나 구금을 당한 일은 없었다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김태석은 공을 가로채기 위해서 사건을 조작한 흔적이 보이며, 일제는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을 단순납치사건으로 격하시키고, 조선민족대동단 내의 사소한 의견다툼을 내분으로 크게 부풀린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김춘기가 베이징에서 왔다는 것은 이회영과 양기탁의 지시를 따랐다는 증거가 된다.

7) 이종욱과 조계종11)
 중ㆍ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우리 불교를 전쟁의 총알받이와 재산을 강탈할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표기관 설립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당시 이토오 히로부미를 기념하는 사찰인 박문사의 일본 스님이 “한국불교를 장악하고 통제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이종욱, 김상호, 만공, 오성월 스님이 본사주지회의를 열고 총본산과 종단을 만들자고 추진해 각황사를 보수해 현재 조계사12)로 이전하고 1941년 4월 23일 임제 스님의 선 정신을 담은 조선불교 조계종을 출범시켰다. 종정과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 종회를 만드는 등 자생적인 종단을 출범 시켰다. 대흥사 조실 천운스님이 2005년 4월15일 인터뷰기사는 이종욱의 친일논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김구가 귀국하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당시 불교혁신동맹 청년당원이었던 강석주, 김어수 등이 김구를 마중하러 갔다. 이들은 이종욱이 친일파라 하여 종무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린 주역들이었다. 김구가 마중나온 불교계 인사와 악수하다가 이종욱이 보이지 않는 까닭을 물었고, 친일파라 하여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는 대답을 듣더니 진노하였다.

”이종욱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해준 불교계 대표적 인사“라고 김구)가 설명하자, 김어수 등은 이종욱을 찾아 참회하였다. 용성, 만공, 한암, 구하, 성월, 대은 스님이 이종욱을 좋아하였다. 이들이 이종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준 스님들이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요령을 좌우로 흔들며 옴마니반메훔을 외면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았다는 뜻으로 서로 교감하였다.
 
 범어사의 이동인과 백담사의 탁몽성은 갑신정변 때 혁신파에 속하는 스님이었는데, 탁몽성은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나 참가하게 되었다. 탁몽성의 제자가 불영사의 이설운이며, 이설운의 제자가 이종욱이다.13) 경허의 제자는 범어사의 성월, 부산 선암사의 혜월, 수덕사의 만공, 만주의 수월, 월정사 한암, 해인사의 제산 등이다. 만공은 한용운을 “내 애인”이라며 아꼈으며, 김좌진과는 팔씨름을 하며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각주)-----------------
 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도서출판 진, 1997. 247쪽-249쪽
 김경천: 경천아일록, 학고방, 2012. 69쪽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신복룡: 대동단 실기, 도서출판 선인, 2003. 173쪽
 권희목도 이종욱과 같이 한성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정안립과 관계된 사람들은 한성임시정부에 관여하였다.
 이정규: 우관문존,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 150쪽, 독립운동 사화,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221쪽-225쪽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304쪽-307쪽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5권 대동단사건 Ⅰ> 경무총감부, 경찰서 조서> 鄭南用 신문조서(제1회): 문: 京城에 온 용건 및 그 月日은 어떠한가? 답: 금년(1919년) 음력 4월 20일  京城에 왔는데, 용건은 나의 외사촌 형인 嚴享仁이란 사람이 奉天 東十字街 十間房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는 바, 그의 누이동생을 奉天으로 불러들인 바 있어 나는 그곳까지 배웅하러 따라갔다가 와서 지금까지 경성에 있다.  全協이 그렇다면 자기 친구의 친척이 창의문 밖에 있으니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리고 나서 적당한 역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여 全協, 羅昌憲, 나도 그곳의 집을 보러가서 정했던 것이다.  그때 李乙圭는 전하께서 安東縣으로 가시면 여관으로서 어떤 서양 사람의 집을 빌어두었다고 하였다. 나는 李와는 세검정 위의 소림사(종로구 홍지동 80)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한발 먼저 나는 崔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점심 후 소림사로 가던 도중에 宋世浩와 李乙圭가 왔는데, 宋은 용건이 있다며 성안으로 갔으므로 李를 데리고 崔의 집으로 되돌아 와 전하께 소개하였다. 그날 점심을 마쳤을 때 전하의 소실 두 사람이 의복을 넣은 가방 2개를 가지고 왔는데, 결국 소실은 뒤에 전하가 계신 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진원.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백과 첩보)/문화원형백과>군사/외교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보천교의 십일전을 해체하여 서울로 옮겨와서 태고사를 지었는데 지금의 조계사이다. 태고사를 지을 때 실무를 맡아서 처리한 사람이 이종욱(李鍾郁)이다.
 박희승: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주) 조계종 출판사, 2011. 26쪽

각주)-----------------

다음회에 계속

이해준 원장은 서울대 치대를 졸업했다. 의학박사이자 대한치과의사학회 총무이사다. 강남구 치과의사 회장, 대한치주과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이해준치과의원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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