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중국회화의 교섭

고려시대에는 중국과의 회화적인 교섭도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는 이미 5대(五代)부터 중국와의 회화교섭을 가졌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의 태조 6년(923)에 후량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이 오백나한상을 가져와 해주의 송산사에 두었던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요나라와도 교섭을 가졌던 것이니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문공인이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백동, 나전기, 그리고 서화병선 등 사사로이 선물했던 사례로 분명해진다. 

그러나 고려와 중국간의 회화 교섭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역시 북송때라 하겠다. 이때에는 공식적인 외교적 관계와 해상을 통한 사무역을 매체로 양국의 화가들과 그림들이 활발하게 교류됐다.

특히 고려의 문종(재위1047~1082)과 북송의 신종(재위 1067~1085)연간 그리고 고려의 예종(재위 1106~1122)과 북송의 휘종(재위1100~1125)연간에는 양국간의 회화교섭이 더욱 활발했다. 이 시기에는 고려가 문화의 번성을 꾀하고 북송이 요나라와 금나라의 위협에 대비하여 고려와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기 때문에 회화적인 교섭도 자연 빈번하게 됐다. 

이제현, 「기마도강도」, 고려, 14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먼저, 고려가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예를 보면 고려의 문종이 1074년에 김양감을 사신으로 북송에 보내 중국의 도화를 예의(銳意)하게 사들였고 1076년에는 사신 최사훈에게 화공몇사람을 함께 보내 중국의 상국사 벽화를 모사했다가 흥왕사 벽에 옮겨 그렸던 실례가 보인다.

이 밖에 중국으로부터 고려에 파견되는 사행원(使行員)중에는 그림에 능한 사람들이 끼여 있었던 것이 분면하다. 원풍 6년에 고려에 사행원으로 왔다가 산천형세와 풍속호상을 몰래 살펴보고 도기를 찬했던 송구나 선화 6년(1124)에 고려에 왔다가 휘종에게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바쳤던 서긍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고려쪽에서도 화원을 중국에 자주 보냈던 것이 분명하다. 소동파가 북송의 철종에게 낸 「논고려진봉장(論高麗進俸戕)」에서 고려의 사신들이 올 때 중국의 산천을 그리고 서적을 구매해 간다고 강경한 진언을 했던 사실이나, 안팽서도 언급한 바처럼 이녕이 사행원으로 북송에 가서 휘종의 절찬을 받았던 사실은 고려에서도 기회있을 때마다 중국에 선화자를 파견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고려의 회화가 중국으로 건너가 일부의 중국 수집가들에 의해 소장되고 있었음이 곽약허의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권 6의 고려국조에 의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회화가 비단 중국쪽으로부터 고려에 의해 흘러들어왔을뿐만 아니라 반대로 고려에서 중국쪽으로 많이 전해졌음을 말해준다. 

북송으로부터 고려의 왕실에 전해진 많은 명화(名畫), 법서, 진기물들은 고려 궁중내의 천장각, 청연각, 보문각등에 나누어 보관되었으나 이들에 관한 그 후의 행적은 묘연하다. 북송이 멸망항 후 고려는 북쪽의 금나라 및 남쪽의 남송과 여전히 활발한 회화교섭을 벌였다. 그러한 결과로 금나라에
서 유행하던 북송의 화풍들과 남송의 마원과 하규 그리고 유송년을 중심으로 한 마하파는 원체파가 고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러나 고려와 금 및 남송과의 회화관계는 자료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어 더 깊은 파악이 어렵다. 

그 다음, 고려와 원나라(1206~1367)와의 관계에서는 좀 더 신빙성있는 파악이 가능하다. 양국간에는 혈연적인 관계가 맺어져 고려는 한족의 문물과 몽고족과의 풍습에 전에 없이 밀접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양국간의 공적인 관계는 3만 여명에 달하는 고려인들이 살고 있던 북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279년 남송이 원나라에게 멸망된 후로 한·중간의 해상무역은 실질적으로 끝나게 됐다. 
때문에 당시 남종문인화의 본거지였던 강남지방과의 왕래는 끊기게 됐다. 이것은 결국 중국 남종화가 우리나라에 바로 전해지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고려와 원나라와의 회화교섭은 이미 고종 19년(1232)에 몽고에 각종 비단과 금은주기 및 화선등을 기증함으로써 시작됐다. 그 후 충렬왕 30년(1304)에는 또 「금강산도」를 원나라에 기증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보면 고려와 원나라와의 회화교섭은 13세기에 시작되어 14세기에 활발
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원나라초기에는 중국의 그림이 고려에 들어오는 것보다 반대로 고려의 그림이 원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회화교섭이 특히 활발했던 때는 충선왕(1275~1325)이 심양왕으로 원나라에 있었을 때이다. 
충선왕은 북경에 만권당을 짓고 시서화(詩書畫) 삼절에 능한 명유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때 만권당을 자주 드나들며 충선왕과 이제현을 가깝게 사귄 중국사람들중에는 원대의 유명한 문인화가인 조맹부와 주덕윤이 있었다. 

조맹부와 주덕윤을 통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곽파 화풍을 비롯한 원대의 몇가지 화풍이 고려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제현과 주덕윤은 당시의 중국회화를 함께 감상하기도 했다. 예들들면 이들은 같이 회화를 감상하면서 일본사람인 철관의 산수에는 승기(僧祇)가 있고 왕공엄의 초화도에는 사풍이 없으며 월산 임인발의 화마도에는 뼈를 그리지 않았다. 식재 이간과 송설 그리고 조맹부만이 단청의 습속을 없앴고 도사 장언보는 정공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평을 한바 있다. 이 밖에 이제현은 유도권의 산수에도 찬문(讚文)을 썼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화가들이 당시 충선왕과 이제현이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주로 접했던 중국의 주요화가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이들의 작품들이 고려에 많이 전해져 조선초기까지 남아 있었음이 이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실려있는 안평대군 소장품 목록을 통해 밝혀진다. 
원나라때의 이 화가들중에서도 지정연간(1341~1367)부터 산수화가인 정언보와 유도권이 특히 유명했다.

장언보는 도사이자 궁중화가였으며 원체화와 문인화풍을 모두 잘 그렸다. 그 밖에 말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유도권의 화풍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밝힐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원대의 북경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곽파화풍을 위시한 몇몇 화풍들이 고려에 전해져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 이제현이 원에 머무는 동안 1319년 33세의 나이로 충선왕을 모시고 강남지방을 여행했을 때 진감여에게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받았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원나라 초상화연구에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고 고려시대인물화 연구에도 
참고자료가 된다. 

고려와 원나라와의 회화교섭에서 또하나의 주목할 만한 계기는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왔던때이다. 이때 노국공주는 각종 집물과 그릇 그리고 책과 함께 사화를 배에 싣고 왔는데 이 때에 가져온 많은 수의 그림들이 16세기 전반까지도 남아 있었다. 김안로(1481~1537)는 그
의 용천담적기에서 “지금 전해지는 묘회보축(妙繪寶軸)은 다수가 그 때 건너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중국의 그림들이 원나라로부터 고려에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 반대로 고려의 그림이 원나라로 들어간 숫자도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높이 평가되어 다수가 원나라에 전해졌다. 

원나라의 탕후의 고름화감이나 하문언의 도회보감에는 “고려의 그림에는 관음상들이 매우 공료한데 이것은 당나라때의 위지을승의 필의에서 나와 섬려함에 이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어 당시 중국인들의 고려시대 불교회화에 대한 평가를 엿볼수 있다. 
이때문에 고려는 원의 요청에 따라 충선왕 2년(1310), 충숙왕후원년(1332), 충혜왕후 5년(1344에 각각 불화를 원나라에 보냈고 또 그 밖에도 몇차례에 걸쳐 많은 사경승들이 그곳에 보내졌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와 원과의 회화교섭이 매우 활발했고 그에 따라 양국의 회화가 상대편 나라에 다수 전해졌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러한 교섭을 통해 고려의 회화가 불교회화의 경우처럼 훌륭한 발전을 이룩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 보이는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들은 전해지는 작품이 극히 적은 고려시대의 회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려시대말기에는 명나라와도 25년간 회화교섭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기간도 짧고 자료도 없어 언급하기 어렸다. 고려는 중국 역대조와 회화교섭을 유지했고 이 밖에도 일본의 회화와도 교류가 있었던 듯하다. 앞에서 언급한 일본의 승려화가인 철관의 이름이 보이고 중암이라고하는 중의 존재가 주목된다. 특히 철관은 원나라에서 활동했던 일본 화가다. 이 밖에는 고려와 일본과의 회화관계에 대한 자료가 희소하여 구체적인 파악은 불가능해 아쉽다.


다음호 부터는 조선왕조 초기의 회화가 이어진다

저작권자 © 덴탈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