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혜허의 양류관음상과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고려불화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서구방에 의해 제작된 「양류관음반가상(楊柳觀音半跏像)」<그림1>이다.

그림❶ 서구방, 양류관음반가상, 고려, 1323년, 견본채색
그림❶ 서구방, 양류관음반가상, 고려, 1323년, 견본채색

앞의 그림과는 달리 이 작품은 바위에 걸터 앉아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꼬아올린 모습의 관음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1323년에 서구방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원형의 무늬가 박힌 투명한 옷에 감싸인 이 관음상은 약간 왼편을 향하여 우아하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다. 

호화롭고 투명한 옷자락, 그 옷자락이 그어내리는 부드러운 곡선, 머리와 목과 팔에 부착된 사치스러운 장신구, 그리고 노출된 몸에 칠해진 찬란한 황금빛 등이 한데 어울려 이 반가의 관음상을 한없이 미려(美麗)하고 숭고한 존재로 부각시켜 준다. 

이러한 고귀한 모습이 관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주변의 바위와 산호와 이름모를 꽃들이다. 청록(靑綠)과 금니(金泥)로 칠해진 바위들은 바위라기보다는 차라리 금벽(金碧)의 보석처럼 보인다. 이 점은 근경(近景)의 산호나 꽃, 바위 틈에서 흘러 내리는 물살, 그리고 버들가지가 꽂혀있는 정병(淨甁)과 그것이 담겨 있는 유리그릇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처럼 관음과 그 주변이 하도 미려하고 숭고하게 꾸며져 있어 근경의 왼쪽 구석에 합장하고 앉아서 우러러보고 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모습은 자칫하면 잊혀지기 쉽다. 이러한 관음의 자태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에 의해 화면에 틀 잡힌 듯 고정되어 있다. 
이 관음상에 보이는 유연하고 곡선적인 자태, 금색과 청록 등 화려한 채색을 가한 미려한 장엄(莊嚴)등은 고려 말 불교회화의 특색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밖에도 관음의 가늘고 긴 눈이며 지나치게 작은 입도 이 시대 고려불상의 한가지 특색을 드러내 주고 있다. 

금색은 뒷면에서 칠하여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한 이른바 복채법(伏綵法)으로 설채되었기 때문에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그 호화로움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관음이 앉아 있는 주변의 바위들은 구륵(鉤勒)으로 정의되고 청록과 금니로만 처리되어 있을 뿐 뚜렷한 준법이 구사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불교회화가 지니고 있는 전통성(傳統性)과 보수성(保守性)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서구방의 양류관음반가상과 비슷한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이 밖에도 여러 점이 밝혀져 있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질 것으로 믿어진다. 앞에 살펴 본

고려말기 불화의 특색은 이 시대에 자주 그려졌던 「지장보살상(支裝菩薩像)」소장 「지장보살입상(支裝菩薩立像)」<그림2>은 그 대표적 예이다.
왼손엔 석장(錫杖)을, 오른손엔 보주(寶珠)를 들고 서 있는 피모(披帽)의 지장을 묘사하였다. 연화위에 자연스럽게 서 있는 보살의 곡선진 몸매, 각종
의 예쁜무늬가 든 옷자락의 유연한 흐름새, 길고 부드러운 눈매와 작고 야무진 입, 투명한 보주의 영롱함, 그리고 작은 원문이 촘촘히 박힌 피모, 이러한 모든 특색들은 이 지장보살을 고려만의 존재로 부각시켜 준다. 이 지장보살의 모습에서 우리는 두려운 저승의 지배자로서의 존재보다는 한 사
람의 귀공자를 대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지장보살은 이렇듯 단독의 입상(立像)으로도 나타나고 좌상(坐像)으로도 묘사되었다. 또한 피모를 쓴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삭발한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그리고 좌우에 시왕을 거느린 모습으로도 자주 그려졌다. 
이러한 몇가지 형태의 지장보살상들이 일본과 구미 지역에 남아 전해지고 있어서 고려말 불화의 경향을 엿보여 준다. 이러한 정교한 불교회와 아울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시대의 나한도(羅漢도)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나한 신앙이 두터워 나한재(羅漢齋)나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기 빈전하게 개최되었다. 또 일찍이 태조6년(923)에는 후량으로부터 오백나한상을 들여오기도 했다. 
이러한 나한신앙의 결과로 오늘날 국내외의 고려시대의 나한도가 몇점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한때는 중국의 작품으로 추측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나한도들은 대체로 어떤 범본을 따라서 직화가들이 그린듯 필치가 경직된 느낌을 준다. 또 나한도 특유의 자유롭고 개성이 넘치는 분위기를 결하고 있어 앞에 살펴 본 전형적인 불교회화들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한다. 
「제234 상음수존자상」은 이러한 나한상들의 한 전형을 잘 보여준다. <그림3>

이 그림은 국가의 평화와 왕의 만수무강을 빌기위해 을미년 7월에 김의인의 지원아래 그려졌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을미년이 서기로 몇 년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서는 1175년이나 1235년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그렇게 올라갈 수 있는 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이 그림은 약간 왼편을 향하여 원형의 암반위에 앉아 있는 나한을 표현했다. 

얼굴과 의습은 거의 백묘에 가가운 필선으로 주로 묘사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음영이 가해졌다. 얼굴에는 비교적 정기가 깃들여져 있으나 의습의 처리에는 일말의 경직성이 깃들어 있다. 앞에 살펴본 불화들이 지니고 있는 유려한 곡선미나 호화로운 장엄성이 이 그림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단부의 암반처리에는 이곽파적인 요소가 드러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즉 필획이 구분되지 않게 붓을 잇대어 써서 침식된 암괴를 묘사하고 점을 가하여 침식공을 표현하는 이곽파 특유의 기법이 암반의 처리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곽파 화풍은 우리나라에 이미 고려시대에 전래되었음이 단편적인 문헌자료와 이러한 영세한 자료를 통해서나마 확인이 된다. 

이 화풍은 뒤에 살펴보듯이 조선초기에 이르러 안견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하나의 밑거름이 된다. 
고려시대에는 그 밖에도 감지에 금니나 은니로 사경하는 일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금은니사경에는 변상도(變狀圖)가 그려져 있어 회화사연구에도 도움을 준다. 이러한 변상도들은 대체로 당시의 불교회화와 공통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이 변상도들에 대한 회화사적인 측면에서의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불교회화의 전통은 일반회화의 경우와 같이 조선왕조 초기로 어느정도 계승되어 조선왕조적인 경향으로 변모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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