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1287~1367) 필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는 이제까지 살펴본 작품들과는 달리 좀 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1)
이 작품은 사대부의 여기화(餘技畵)로서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14세기 우리나라 회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❶ 이제현, 「기마도강도」, 고려, 14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❶ 이제현, 「기마도강도」, 고려, 14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익재 이제현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말의 명유(名儒)로서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원의 연경에 건너가 만권당을 중심으로 중국의 명신 조맹부, 요수, 염복, 원명선 등과 교류했던 인물이다. 또, 그는 원대 이곽파 화풍의 주도적 인물이며 정동행성의 유학제거를 지낸 바 있는 주덕윤과도 친해 종종 중국회화를 함께 감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났던 이제현은 이렇듯 원대회화사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맹부, 주덕윤 등과 가까이 지내고 또, 당시의 중국회화를 다수 접했던 사실은 우리나라 회화사와 관련해서도 많은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라 하겠다.

「기마도강도」는 호복(胡服)을 입은 다섯 사람이 말을 타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장면을 소대로 그린 것이다.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부에 보이는 현애(懸崖)의 한편에 ‘익제’라는 관서와 ‘이제현인’이라는 백문방인이 보이는데 화면과 연륜을 같이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비단 바탕에 수묵과 담채를 주로 썼고 인물들의 복장과 말의 몸과 안장만은 약간 농도가 짙은 채색으로 처리돼 있다.

얼어붙은 강줄기가 화면의 중앙을 굽이쳐 멀어지고 이 강줄기를 따라 눈 덮인 산줄기들이 교차하듯 뻗어 있다. 근경의 언덕 위엔 우람한 절벽이 내리덮일 듯 걸쳐 있고 그 허리를 남송 원체풍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휘감고 있다. 이러한 자연을 배경으로 말을 탄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며 결빙의 강을 유유히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인물과 산천의 포치(布置)가 매우 훌륭하다. 그리고 특히 말을 그린 솜씨가 뛰어난데, 이는 이제현이 가깝게 지냈던 원대 초기 최고의 문인화가 조맹부가 다양한 양식의 산수화와 아울러 준마(駿馬)를 잘 그렸던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산수의 필선(筆線)은 섬약(纖弱)하고 근경의 언덕 처리도 약간 모호하고 어색해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겨 준다.
또 이 그림의 소나무에는 남송 원체화풍의 영향이 엿보이고 잎이 떨어진 채 눈을 이고 있는 활엽수 가지의 표현에는 아직 북송적인 수지법(樹枝法)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산수화 전체의 양식은 중국의 어느 화가의 작품과도 비교되지 않는 특이한 것이다. 특히 이제현이 친밀하게 교류했던 조맹부와 주덕윤의 남종문인화풍이나 이곽파 화풍의 뚜렷한 영향이 엿보이지 않고 있어 당시 중국화 수용 태도에 대한 일말의 시사를 던져 준다.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수렵도」는 석 장의 단편으로 나눠 전해지고 있는데, 본래는 훨씬 큰 그림에서 오려져 나온 것으로 믿어진다.
(그림 2)

그림❷ 작자미상, 안향초상, 고려, 1318년
그림❷ 작자미상, 안향초상, 고려, 1318년

따라서 이 단편들만으로는 본래의 큰그림이 지니고 있던 구도나 공간처리 등을 파악할 수 없다. 게다가 그림이 몹시 상해 필법도 소상히 읽어보기 어렵다. 다만 호복(胡服)을 입고 채찍을 가하며 힘차게 말을 모는 무사들의 모습과 북종화적인 잡목의 묘사, 그리고 짙은 채색의 사용이 눈에 띤다.
호복의 기마인물을 소재로 다룬 점과 수목의 처리법 등은 기본적으로 이제현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의 유사한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현의 그림이 훨씬 섬세하고 유연한데 반해 공민왕의 전칭 작품은 좀 더 동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민왕(1330~1374)도 만 11세 때인 1341년부터 21세 때인 1351년까지 10년간 연경에 체재했었지만 그곳에서 화풍상의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그의 전칭 작품인 「수렵도」에도 당시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꽃피고 있던 남종문인화풍이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있어 당시 연경을 중심으로 한 한·중 사이의 회화 교섭을 짐작하게 한다.

이 밖에 일본에 전해지는 몇 폭의 그림들이 고려시대 산수화로 믿어지고 있다. 우선 고연휘의 작품으로 일본에서 전칭되고 있고 고려의 그림으로 일본 학자들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와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의 쌍폭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북송의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에 의해 형성되고 원나라 초기의 고극공(高克恭)에 의해 계승된 소위 미법산수(米法山水)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형태가 지나치게 경직되고 필벽(筆癖)이 너무 강한 점이 전통적인 중국의 미법산수와 크게 다르다. 비수가 불규칙한 윤곽선이며 땅으로 꺼질 듯 주저앉은 지붕이며 눈 덮인 잡목들의 자태 등은 고원적(高遠的)인 구서이나 굳은 듯한 형태와 더불어 이 그림들이 우리나라의 작품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고려 말기의 미법산수 전통이 조선 초기로 계승되어 후에 살펴볼 서문보, 최숙창, 이장손 등의 화풍에 영향을 미치게 됐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초상화와 인물화가 활발히 제작됐음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본래 초상화는 중국에서 감계적(鑑戒的)인 기능을 지니고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후에 유교의 정교사상(政敎思想)에 힘입어 더욱 유행하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제왕도상(帝王圖像)과 공신상(功臣像)은 물론 사대부와 고승의 초상화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제작됐다.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악 3호분(安岳3號墳) 묘주 부부의 초상화를 비롯한 고구려 초기 고분벽화에 그려진 것들 이외에도 백제의 아좌 태자가 일본 쇼우도꾸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 좋은 예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도 초상화는 계속 제작됐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솔거가 단군 어진(御眞)을 근 1000본이나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은 그 대표적 예의 하나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918~943)때부터 이미 원찰(願刹)을 짓고 그 절들에 그 진영(眞影)을 봉안하기 시작했던 것이니 그 후로 이뤄진 진전(眞殿)의 발달은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 밖에 공신상과 사대부들의 초상화도 빈번하게 제작됐다. 또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초상과 염제신 등 여러 신하들의 초상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자화상을 그리기도 해 고려시대 초상화 제작의 성행을 짐작케 한다.

이 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로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고작 「안향초상화」와 「이제현초상화」 정도인데 「안향초상화」는 홍포(紅袍)를 입고 나지막한 검은색 복두(幞頭)를 쓴 채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노년의 안향(1243~1306)의 모습을 반신상으로 그린 것이다.(그림 3)

그림❸ 공민왕, 「수렵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❸ 공민왕, 「수렵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의 위쪽에는 안향의 아들인 안우기의 제찬(題贊)이 씌어 있어 초상화 제작의 연유를 밝혀 준다. 본래 안향이 죽은 지 12년 후인 1318년에 충숙왕이 학교를 세운 안향의 공을 인정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기 위해서 제작을 명했던 것인데 그것을 다시 모사(模寫)해 향교에 계안케 했던 것이다.

가슴에는 원나라 사람의 작품으로 전승되는 모양이나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화풍이 조선시대의 초상화나 인물화와 상통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초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이 초상화의 조선시대 중모본(重模本)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얼굴의 윤곽을 부드러운 붉은 선으로 정의했는데 이 점은 아마도 고려시대의 초상화와 조선왕조시대 초상화를 구분지어 주는 큰 특색의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홍포의 의습선은 비수가 없는 가늘고 유연한 선으로 간략하게 묘사돼 있다.
전반적으로 이지적인 학자의 풍모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기법은 어딘지 선종화(禪宗畵) 계통의 인물화법을 연상시켜 주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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