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

4. 통일신라의 회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제각기 성격을 달리하는 화풍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불교조각이나 공예의 경우처럼 서로 통합되고 조화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벽화의 전통은 끝나고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시대 말기에 설치됐던 채전(彩典)이 계속해서 기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솔거, 정화, 홍계, 김충의 등의 유능한 화가들이 배출됐다. 
그리고 당과의 빈번한 문화교섭을 통해 궁정 취미의 인물화와 청록산수화가 발전했고 또한 불교회화가 활발히 제작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이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 중에서 솔거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경주의 황룡사에는 노송을, 분황사에는 관음보살상을, 그리고 진주의 단속사에는 유마상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뤄보면 그는 일반회화뿐만 아니라 불교회화에도 뛰어났던 인물로 생각된다.
그런데 황룡사에 그린 노송은 너무나 훌륭해 까마귀, 제비, 참새 등의 새들이 종종 날아들다 떨어지곤 했으나 세월이 오래돼 중이단청으로 보충했더니 새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설적인 얘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그림은 우선 채색화로서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또 당시 당에서 청록산수화가 유행했던 사실에 의거해 한 번 더 생각을 비약시킨다면 솔거는 청록산수 계통의 강한 채색산수에도 뛰어났던 것이 아닐까 유추된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승려화가로서는 경명왕 때에 흥륜사의 벽에 보현보살상을 그렸던 정화와 홍계의 이름이 전해지는 데에 불과하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창성하고 수다한 절들이 지어졌으며 이에 따라 불교미술이 꽃피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 시대에도 불교회화가 크게 발달했을 것이 쉽게 추측된다.
한편 당에 건너가 활약했던 화가로는 장군 김충의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 
당의 장언원이 지은 역대명화기에 의하면 그는 당의 덕종조에 활약했는데 그의 그림은 정묘하나 격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화가(餘技畵家)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시대에는 또한 당으로부터 궁정 취미에 맞는 중국의 회화도 종종 수입했던 모양이다. 
일례로 북송의 곽약허가 지은 도화견문지에 의하면 당의 정원년간(785~804)에 신라인들이 당시 중국의 대표적 인물화가였던 주방의 그림 수십 권을 후한 값으로 사 가지고 귀국했다 한다.
이상의 단편적인 기록들로만 미뤄 봐도 통일신라대에 당과의 회화 교류가 빈번했으며 또 수준 높은 회화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그림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이 시대의 다른 미술 분야의 경우와는 달리 체계적인 파악이 불가능하다. 
다만 1977년에 「대방광불 화엄경 변상도」가 발견돼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불교회화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림 1>

이 변상도는 두 개의 경권(經卷)과 함께 발견됐다.
발견된 두 개의 두루마리 중에서 하나는 삭아서 펴볼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하나는 본래 43권부터 50권까지의 화엄경을 필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변상도는 바로 43권부터 50권까지의 경권을 감싸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표장의 안쪽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 바깥쪽에는 역사상(力士像)과 보상화문(寶相華文)이 그려져 있다. <그림 2>

이 표장화는 내면의 변상도나 외면의 역사상 및 보상화문 모두 자색으로 물들인 닥종이에 금은니(金銀泥)로 그려진 것인데 중앙부 및 상단과 하단이 훼손된 채 두 쪽이 나 있으므로 완전한 감상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이 표장화가 감싸고 있었던 경권의 끝에는 발문(跋文)이 적혀 있어 이 화엄경 사경의 제작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그 발문에 의하면 이 화엄경권은 황룡사의 연기법사의 발원에 의해 천보 13년(754) 8월 1일에 시작해 이듬해인 755년 2월 14일에 완성됐으며 이 경권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은 의본, 정득, 광득, 두오 등이 그렸다고 한다.

따라서 이 표장화는 755년 초에 위에 든 네 사람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장화는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의 절정을 이룬 석굴암의 조성과 연대를 거의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즉,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제작된 좋은 예인 것이다.
먼저 표장의 안쪽에 그려진 변상도는 좌우로 두 쪽이 나 있어 정확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2층의 목조건물을 배경으로 좌정한 크고 작은 불보살군(佛菩薩群)을 묘사하고 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보광명전중회를 표현한 것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불보살들의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태, 그들의 균형 잡힌 몸매가 보여주는 부드러운 곡선, 정확하고 정교한 묘선(描線), 호화롭고 미려한 분위기 등은 이 변상도의 우수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8세기 중엽 경 통일신라의 불교회화가 당시의 불교조각과 마찬가지로 중국 당대의 미술과 밀접한 교류를 
유지하면서 지극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입증해 준다.

이 점은 변상도의 바깥쪽에 그려진 역사상과 보상화문에서도 마찬가지로 간취된다. 

보상화문과 역사 주변의 화염문 표현에는 약간 도식화된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역사의 묘사에는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이상화(理想化)된 사실주의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는 아직도 우리나라 회화사상 삼국시대보다도 더 큰 공백기로 여전히 남아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 시대의 북쪽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발해(711~926)에서도 회화가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석(松石)과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고 하는 대간지라는 화가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고 길림성 연변 화룡현의 서용두산에서 발굴된 정효공주의 묘에 그려진 벽화가 우수해 이를 말해 준다. 
이 묘의 연도와 묘실에는 묘지기, 시위자, 시종, 악기인, 내시 등이 유려한 먹선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화면에 입체감과 생동감이 넘친다고 한다.
이 무덤에는 인물들만이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두건, 장포, 가죽장화 등을 착용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몸매가 퉁퉁하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걷고 있는 것처럼 측면관으로 묘사돼 있다. 
퉁퉁한 몸매나 복장, 그리고 인물들의 동작 등에는 당대 인물화의 영향이 엿보이면서도 여러 가지 세부의 표현에는 그와 다른 양상도 두드러져 보인다.
앞으로 이를 토대로 발해의 회화가 재조명돼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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