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

본지는 앞으로 안휘준 교수의 著書 『한국회화사』를 연재하려고 한다.
선사시대의 선각화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繪畫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중기·후기·말기의 회화에 대한 안휘준 교수 특유의 문체와 시각으로 한국의 회화사를 조망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편집자주)

 

3. 신라의 회화

신라에서도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화가 활발히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단편적인 회화사료들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나 그러면서도 고구려나 백제와는 성격이 다름을 나타내고 있다.

신라에서는 채전을 설치했었음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기구는 아마도 후대의 도화원처럼 회사를 관장했던 곳이 아닐까 여겨진다. 
채전은 공장부와 함께 진덕여왕 5년(651년) 이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경덕왕(재위 742~764) 때에는 한 때 전채서로 바뀌었다가 다시 예날 이름을 되찾았던 모양이다. 
채전은 감(監) 1인, 주서(主書) 2인, 사(史) 3인으로 구성됐던 모양인데 이중에서 주서 2인은 진덕여왕 5년(651년)에 설치됐던 것으로 봐 채전의 설치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채전이 일종의 화원이었다고 본다면 신라인들이 회화의 수요에 조직적으로 대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고신라 말기에는 이미 당으로부터 중국의 궁정화가 들어오기 시작해 신라회화에 자극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후에 선덕여왕이 된 덕만공주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덕만은 진평왕(재위 579~632) 때에 당나라에서 들여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고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음에 착안해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심어보니 그의 말대로 향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덕만의 총명함을 입증해 준 얘기이지만 또 동시에 고신라 말기에 벌써 당으로부터 궁정 취향의 그림과 꽃들이 수입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솔거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8세기 중엽 즉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진주의 단속사에 유마거사상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을 믿는다면 아마도 그는 삼국시대 신라인이기보다는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로 봐야 할듯하다. 
그러므로 솔거에 관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회화를 논할 때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솔거를 통일신라시대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고신라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이름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셈이다. 

또한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와 같이 고신라 시대의 화공들도 일본 회화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믿어지지만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것은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신라가 이룩한 고도의 미술문화나 고구려, 백제 및 중국과 가졌던 활발한 문화 교섭, 이 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몇 몇 회화자료 등으로 미뤄보면 고신라에서도 회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 중에서 화적이 가장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신라이다. 
그러나 근래에 발굴을 통해 빛을 보게된 경주 155호분 출토의 천마도, 기마인물도, 서조도, 98호분 출토의 우마도, 그리고 영주 순흥의 어숙술묘 내벽과 천정에 그려진 인물과 연꽃 등의 자료를 통해 신라회화의 최소한의 수준을 알 수 있게 됐다.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마구장비 위에 채색을 써서 그린 일종의 장식그림이다.(그림 1)

그림 1 : 천마도, 신라, 5~6세기 경, 경주 155호분 출토,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그림 1 : 천마도, 신라, 5~6세기 경, 경주 155호분 출토,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사방의 주변을 인동당초문대로 돌리고 그 안에 달리는 모습의 백마를 그려 넣었다. 
이 말의 갈기와 꼬리털은 한결같이 수평을 이루며 휘날리고 있어 강한 속도감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네 발은 터덜터덜 걷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상호 모순된 느낌을 준다. 

또 혀를 길게 빼고 몸에는 반달 모양의 무늬가 나 있고 앞가슴과 뒷발 사이에는 각각 갈쿠리 모양의 것이 달려 있다. 
이 반달 모양의 무늬는 남부 러시아에 토대를 뒀던 고대 스키타이족의 문화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인동당초문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것들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그러나 달리는 말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말들에 비해 힘찬 동감이 결여돼 있다.
이 점은 환형의 자작나무 껍질테 위에 반복적으로 그려진 기마인물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신라의 회화가 고구려에 비해 뒤쳐져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차이는 오히려 고구려의 벽화들이 회화를 전문으로 하던 화공들의 솜씨에 의한 것인데 반해 신라의 천마도나 기마인물도는 공예를 주로 하던 장인의 솜씨에 의한 것이었던 데에 연유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98호분에서 출토된 검은 칠기의 바탕에 빨간색 선묘로 그려진 우마도는 비록 잔편이지만 신라시대 회화의 이해에 다소 도움이 된다.(그림 2)

그림 2 : 우마도, 신라, 6세기 경, 경주 98호분 출토, 국립경주박물관소장
그림 2 : 우마도, 신라, 6세기 경, 경주 98호분 출토, 국립경주박물관소장

이것 역시 공예화이기는 하지만 장인의 예리한 관찰력과 능숙한 묘사력을 잘 보여 준다. 
구성도 좋고 또 동물들의 동작에서 오는 동감이 잘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순흥 어숙술묘의 벽화는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힘드나 연화문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이 엿보인다. 

저작권자 © 덴탈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