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

본지는 앞으로 안휘준 교수의 著書 『한국회화사』를 연재하려고 한다.
선사시대의 선각화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繪畫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중기·후기·말기의 회화에 대한 안휘준 교수 특유의 문체와 시각으로 한국의 회화사를 조망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편집자주)
 

 

우리나라의 미술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 각 방면에 걸쳐 크게 발전했다.
특히 회화 분야에서는 선사시대의 선각화와는 달리 먹과 채색을 써서 표현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림이 활발하게 제작됐던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거해 보면 삼국시대 중에서도 회화가 특히 발전했던 것은 대체로 4세기경부터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회화는 순수한 감상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무덤의 내부 벽면이나 사찰의 벽면에 당시의 우주관, 종교관, 사상 등을 표현하거나 공예품을 장식하는 따위의 실용적인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벽화나 공예화 이외에도 비단에 족자처럼 그린 그림들도 제작됐을 것으로 생각되나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구체적인 얘기를 할 수 없다.
이 시대에는 회화를 전업으로 하는 직업 화공들이 다수 배출돼 당시의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또 이들 중에는 뒤에 살펴보듯이 일본에 건너가 그곳 회화 발전에 공헌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

삼국시대의 회화는 같은 시대에 같은 한반도를 무대로 하고 또 서로 교섭을 했으면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제각기 다른 화풍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 시대 조각이나 공예에서처럼 고구려가 힘차고 율동적이면서도 긴장된 느낌의 화풍을 이룬데 반해 백제는 완만하고 유연하며 느긋한 느낌을 주는 양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또한 신라는 무덤에서 출토된 공예화들에 의거해서 보면 다른 고분미술품들과 마찬가지로 어딘지 정밀하고 사변적이며 엄격하고 추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같은 우리나라 회화이면서도 국가와 지역에 따른 차이가 일찍부터 나타나게 됐던 것이다.


1. 고구려의 회화 (1)

삼국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회화를 발전시켰던 것은 고구려이다.
고구려에서는 수다한 각종 그림들이 그려졌을 것이지만 지상에 존재했던 그림들은 모두 산실됐고 오직 무덤 내부에 그려진 벽화만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일본에 전해지는 기록과 몇 개의 작품들이 고구려 회화의 이해에 다소 도움을 준다.

고구려는 많은 고분벽화를 남기고 있어 당시의 회화사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고분벽화는 고구려에서 가장 성행했지만 그 밖에 백제, 신라, 가야에서도 소극적이나마 제작됐다.

그러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괄목한 만한 고분벽화를 남기고 있는 것은 역시 고구려이다.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의 고분은 만주의 통구와 평양 부근의 용강군, 대동군, 강서군 등지에 걸쳐 50여 기가 발견됐다.
낙랑을 매체로 해 중국 한 대묘의 영향을 받아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믿어지는 이 고분들은 묘실의 구조나 벽화의 내용 및 양식에 따라 대개 3기로 나누고 있다.

초기의 벽화고분은 대체로 4~5세기 전반에 이룩된 것으로 현실 앞에 전실이 있고, 다시 전실의 좌우에 측실이나 감이 달린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가장 전형적이다.
돌을 쌓아 만든 묘실의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그 표면에 묵선과 채색을 사용해 벽화를 그리는데 내용상 가장 중요한 것은 묘주의 초상이다.
이러한 초기 고분벽화의 대표적인 예로 영화 13년의 묵서명이 있는 안악3호분을 들 수 있다.

이 무덤은 묘주가 고구려의 미천왕이라는 설과 중국인인 동수라는 설이 있어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됐던 것인데 묘주가 누구이든 고구려 초기 고분벽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
이 고분의 벽화에는 묘주 생전의 풍족하고 위엄 있는 생활상을 보여주는 풍속화적인 요소들과 약간의 불교적인 요소도 나타나 있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묘주와 그의 부인의 초상화이다.(그림 1, 2)

그림 1 : 안악3호분의 묘주 초상, 고구려, 357년 경, 황해도 안암군
그림 1 : 안악3호분의 묘주 초상, 고구려, 357년 경, 황해도 안암군
그림 2 : 안암3호분의 묘주부인 초상, 고구려, 357년 경, 황해도 안암군
그림 2 : 안암3호분의 묘주부인 초상, 고구려, 357년 경, 황해도 안암군

안악3호분 묘주의 초상화를 보면 주인공이 탑개 속에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데 구도나 필법 등에 고식의 인물화법이 잘 나타나 있다.(그림 1)
묘주 자신의 앉음새도 삼각형의 구성을 보여주지만 그의 좌우에 보좌하고 서있는 인물들도 각각 지위와 거리에 따라 차차 작아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삼각형의 포치 속에 들어가 있다.
또한 묘주의 의습 처리에는 초보적인 요철법 또는 태서법의 음영이 나타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탑개의 네 귀퉁이와 꼭대기는 봉오리진 연꽃과 반개된 연꽃 장식이 각각 부착돼 있어서 이미 불교적 영향의 간접적인 파급을 시사하 고 있다.
이로 미뤄보면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372년보다 적어도 15년 전인 안악3호분의 축조 시에 이미 불교가 서서히 신봉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안악3호분의 묘주부인의 초상은 정면이 아닌 측면을 다루고 있다.(그림 2)
이는 부인이 남편 쪽을 향해 앉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연꽃으로 장식된 탑개 속에 앉아 있는데 풍만한 몸매와 호화로운 의상, 특이한 머리모습 등 당시의 상류층 여인들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또 부인의 뒤에 보좌하며 서있는 여인들의 웃옷은 빨강, 노랑색으로 칠해져 있어 관자에게서 멀어짐에 따라 백적-황의 순서로 채색을 입히는 고대의 설채법을 드러내 보인다.
이런 빨강과 노랑 등의 색이 아직도 명도가 높지 못해 후기의 선명한 색조와 좋은 대조를 보여 준다.
여기에 그려진 부인이나 보좌하는 여인들의 얼굴은 서로 비슷해 개인별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점은 주인 초상과 시자들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4세기에는 개인별 특징을 충실히 살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상화가 아직 발달의 초기단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저작권자 © 덴탈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