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와 아르데코 II

모리스가 주목한 또 다른 영역은 폰트와 북 디자인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값싼 책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책이 대량생산되다 보니 당연히 품질이 현격하게 저하됐다.
이에 모리스는 중세처럼 질 좋은 책을 생산하기 위해 1891년 직접 켐스코트 출판사를 설립한다.
여기서 그는 콰트로첸토의 베네치아 장인 니콜라 장송의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읽기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폰트(‘황금체’)를 개발하는 한편, 아름다운 세밀화로 꾸며진 중세의 서적을 모범으로 삼아 새로이 텍스트와 이미지를 아우르는 ‘북 디자인’을 선보였다.
모리스의 폰트와 번 존스(Burne Jones, 1833~1898)의 삽화로 꾸며진 ‘켐스코트 초서’(그림 1)는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북 디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림 1) 캠스코트 초서, 윌리엄 모리스와 번 존스, 1896년

(그림 1) 캠스코트 초서, 윌리엄 모리스와 번 존스, 1896년

모리스는 미학적으로는 복고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었다.
1884년 그는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세계 혁명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1896)라는 글에서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역사에 대한 공부와 예술에 대한 사랑 및 실천이 나로 하여금······예술을 현재의 삶과 그 어떤 진지한 관련도 없는 골동품 무더기로 전락시킨 이 문명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모리스는 산업화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마지막 공예의 영역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결국 산업 생산물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미학적 실천이 그에게는 자본주의 문명에 저항하는 정치적 실천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공장 생산이 노동과정을 파편화함으로써 노동을 소외시켰다고 느꼈다.
그가 자신의 공방을 중세와 같은 평등한 장인들의 공동체로 운영한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바우하우스도 초기에는 모리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길드’로 출발한 바 있다.
사실 ‘산업화’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사회주의 자체가 기술적 진보의 이념인 이상 그가 반대한 것은 산업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자본주의적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아르누보
‘미술과 공예 운동’이 전성기를 지날 무렵 프랑스에서는 ‘아르누보(Art Nouveau)’라는 새로운 디자인 운동이 발생한다.
이 명칭은 독일계 프랑스인 화상인 지크프리트 빙(Siegfried Bing, 1838~1905)이 1885년에 설립한 화랑의 이름(Maison de l’art nouveau 메종 드 라르누보, 아르누보의 집)(그림 2)에서 유래한다.

(그림 2) 아르누보의 집

(그림 2) 아르누보의 집

 

 

화랑이 생기기 3년 전인 1882년에 빙은 순수예술과 장식예술을 가리지 않고 일곱 명의 작가를 초청해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들의 작품은 1885년 ‘전국예술가회’에 다시 출품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아르누보가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00년에 열린 ‘만국 박람회’였다.
5,00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박람회를 통해 아르누보는 시대를 대표하는 국제적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 운동은 독일에서는 ‘유겐트(Jugend) 양식’, 오스트리아에서는 ‘분리파 양식’, 에스파냐에서는 ‘모더니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개됐다.
물론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흐름을 관통하는 몇 가지 특성은 존재한다.
첫째는 고전주의 혹은 역사주의와의 결별이다.
아르누보는 그때까지 건축과 공예를 지배해 온 역사적·고전적 양식을 거부하고 ‘당대’의 양식을 자처했다.
둘째는 순수예술과 실용예술 사이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지우려 했다는 점이다.
클림트의 작품은 순수회화이지만 공예품 이상으로 장식성이 강하다.
셋째는 꽃이나 식물 등 자연에서 얻은 모티브로 조형을 한다는 점이다.
아르누보는 줄기를 연상시키는곡선으로 대칭을 파괴한다.(그림 3, 4)

(그림 3) 카스텔 베랑제, 엑토르 기마르, 1895~1898년
(그림 3) 카스텔 베랑제, 엑토르 기마르, 1895~1898년
(그림 4)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구스타프 클림트, 1903~1907년
(그림 4)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구스타프 클림트, 1903~1907년

이 세 가지 모두 실은 ‘미술과 공예 운동’에서 유래한 요소다.
모리스 역시 고전적 양식의 단순한 모방을 거부했고 당대의 삶에서 유리된 예술을 비판했으며 벽지 디자인에 식물 문양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미적 이상이 중세에 있었던 모리스와 달리 아르누보의 예술가들은 그런 복고적 태도 없이 곧바로 ‘모던’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르누보는 ‘미술과 공예 운동’보다 현대적 디자인에 한 걸음 더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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