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색채와 공간의 분할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작품과 동전의 앞뒤를 이루는 작품이 있다. 바로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다. 아니에르는 그랑드 자트섬의 맞은편에 있다. 강 건너로 화면 오른쪽 위에 걸려 있는 숲 자락이 바로 그랑드 자트섬으로, 그 시간 거기에는 우리가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보는 바로 그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신인상주의적으로 보이나 확대해보면 점묘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쿠르브부아의 센강]은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와 또 다른 의미에서 짝을 이룬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저 여인은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의 전면에 서 있던 여인을 닮아 있어, 마치 그랑드 자트섬의 산책이 쿠르브부아까지 쭉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림 1, 2, 3)

(그림 1)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조르주 쇠라. 1883~1884년
(그림 1)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조르주 쇠라. 1883~1884년

 

(그림 2)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부분. 조르주 쇠라. 1883~1884년
(그림 2)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부분. 조르주 쇠라. 1883~1884년

 

(그림 3) 쿠르브부아의 센강. 조르주 쇠라. 1885년
(그림 3) 쿠르브부아의 센강. 조르주 쇠라. 1885년

쇠라와 더불어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폴 시냐크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시냐크는 처음에는 클로드 모네에게 매료되었으나, 곧 인상주의의 즉흥적 화법에 염증을 느끼고 들라크루아와 같은 대가들의 엄격하고 철저한 구성을 강조하게 된다.

전환의 계기는 1884년에 있었던 쇠라와의 만남이다. 시냐크는 쇠라의 철저한 과학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앵데팡당 전(展)에서 쇠라의 작품을 본 후 시냐크는 자신의 [모자 만드는 여인들]에 다시 손을 대어 점묘로 고쳐 그렸다. 두 화가는 분할주의의 이론과 기법을 함께 발전시켜 나간다. 쇠라의 그늘에 가려 2인자로 여겨졌지만 신인상주의의 기법을 이론화하고 보급하는 데에서는 외려 시냐크의 역할이 컸다. (그림 4, 5)

(그림 4) 모자 만드는 여인들. 폴 시냐크. 1885년
(그림 4) 모자 만드는 여인들. 폴 시냐크. 1885년

 

(그림 5) 콩블레 성의 목초지. 폴 시냐크. 1886년
(그림 5) 콩블레 성의 목초지. 폴 시냐크. 1886년

쇠라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시냐크는 아예 신인상주의의 대표자로 활동하게 된다. 1886년 그는 파리에서 반 고흐를 알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아니에르로 가서 함께 강변과 거리 풍경을 그리곤 했다. 굵고 짧은 스트로크를 사용하는 반 고흐의 필법에서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마티스 역시 이 시기에는 시냐크의 숭배자였다. 시냐크는 신인상주의의 강령이라 할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8)를 쓴다.

마티스가 야수주의(fauvisme)의 출발점이 된 [사치, 고요, 쾌락]을 그린 것도 이 책의 영향이라고 한다. 마티스는 이 그림의 첫 버전을 신인상주의적으로 그렸으나, 이를 곧 야수주의적으로 고쳐 그린다. 시냐크는 마티스의 이 배신에 크게 분노한다. (그림 6)

(그림 6) 사치, 고요, 쾌락. 앙리 마티스. 1904년
(그림 6) 사치, 고요, 쾌락. 앙리 마티스. 1904년

신인상주의의 3인자는 피사로다. 피사로는 1885년 쇠라와 시냐크를 만난 후 그들의 기법을 창작에 받아들이게 된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두 사람과 공동으로 전시회를 연다. 하지만 그와 신인상주의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사로는 과도하게 냉정한 이 과학적 방법에 금세 피로감을 느껴 다시 인상주의로 돌아가 버린다.

신인상주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의 역할이다. 페네옹은 이 새로운 흐름을 세간의 비난으로부터 방어하여 예술계의 인정을 받는 흐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흐름에 ‘신인상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한 이도 그였다. 정치에 무관심한 쇠라와 달리, 시냐크와 피사로, 페네옹은 무정부주의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림 7)

(그림 7)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화. 폴 시냐크. 1890년
(그림 7)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화. 폴 시냐크. 1890년

“사람들은 내가 그린 것 속에서 시를 본다고 한다. 아니다. 나는 그저 내 방법을 적용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쇠라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그림에 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과학적 방법만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쇠라가 회화에 적용한 그 방법이 정말로 ‘과학적’인지는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비평가나 이론가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그저 쇠라가 말한 것을 그의 그림 안에 접어 넣어 읽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연구는 쇠라의 ‘방법’이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의 색광주의가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신인상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기법이 철저히 과학적이라 믿었지만, 어쩌면 이 발상 자체가 광학에 대한 근본적 오해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감산혼합의 특성을 가진 물감을 병치하는 것으로 정말 가산혼합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사실을 말하면 가산혼합은 오직 빛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실험에 따르면, 병치된 색점의 명도는 두 색의 명도의 산술적 평균에 불과하다. 두 색의 병치로 명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색점들의 병치로 인해 화면이 더 밝아 보인다면, 그것은 병치 자체가 아니라 바탕에 흰색이 많이 사용된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밖에 슈브뢸이 제시한 ‘동시적 대비’의 이론에 대한 그들의 해석도 과학적 오해에 가깝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회화를 과학의 정신 아래 놓아야 한다고 믿은 쇠라의 신념이다. 이는 미술사학자 한스 제들마이어가 현대미술을 추동한 네 가지 동력의 하나로 꼽은 ‘기술적 구축의 충동’을 선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래주의와 구축주의, 데스테일(De Stijl), 바우하우스(Bauhaus)와 같은 흐름이 거기에 속하는데, 이들 흐름은 모두 이미지의 산업적․기계적 제작을 추구했다.

사실 점묘는 밴 데이 망점을 이용한 이미지 인쇄술의 원리를 닮았다.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 위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리히텐슈타인이나 워홀의 인격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 익명적 예술도 그 근원을 찾자면 저 멀리 쇠라에게로 거슬러 올라갈지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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