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14)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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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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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순수 인상주의자들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인상주의는 ‘사물을 보는 방식’에 일어난 혁명이었다. 색이란 빛과 대기가 만들어내는 효과라는 것이 모든 인상주의자가 공유하는 공통의 신념이었다. 이 믿음에 따라 그들은 화면에서 검은색의 사용을 포기하고, 어두운색은 보색을 이용해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다. 또 과거의 화가들이 어두운색으로 바탕칠을 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거기에 흰색이나 밝은색을 사용했다.

그렇기에 인상주의의 화면은 마치 신기루처럼 공기 속에서 산란(散亂)하는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해 야외에서 마치 스케치하듯이 그림을 그렸고, 여기에는 먼저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색을 칠하는 알라 프리마 기법이 사용되었다.

▲ (그림 1) 제1회 인상주의전 포스터. 1874년
▲ (그림 1) 제1회 인상주의전 포스터. 1874년

곧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효과를 포착하려면 윤곽의 명확함이나 세부의 정교함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대상의 윤곽선이 사라지고, 화면은 온통 짧고 두꺼운 스트로크들도 뒤덮인다. 고전적인 회화가 선적(linear)이라면, 인상주의 회화는 회화적(malerisch)이다.

즉, 고전주의 회화가 색채를 형태에 종속시켰다면, 인상주의 회화는 색채의 요란함을 위해 윤곽의 명확함을 희생시킨다. 형태나 윤곽은 눈으로 볼 뿐 아니라 손으로 더듬어 만질 수도 있으나, 색채는 오직 볼 수만 있을 뿐 더듬어 만질 수는 없다. 회화를 촉각적 영역에서 시각적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 이것이 인상주의가 일으킨 ‘지각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림 1)

인상주의 회화를 당대의 유명한 관전파(官展波) 화가였던 샤를 글레르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이 혁명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샤를 글레르는 성서와 신화, 역사 이야기를 즐겨 그린 전형적인 역사화가로서, 모네·르누아르·시슬레·바지유 등 인상주의 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그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관전파 화가답게 글레르는 뚜렷한 윤곽선과 3차원 모델링으로 고대 그리스의 조상(彫像) 같은 느낌의 형(形)을 만든 후 거기에 차분한 색을 입히는 식으로 작업을 했고, 그런 그를 그의 제자들은 아예 ‘고전주의’와 동일시하곤 했다. 물론 제자들에게 스승의 ‘고전주의’는 더 이상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었다. 그들은 관학 예술을 외려 청산해야 할 ‘구태’로 여겼다. (그림 2, 3)

▲ (그림 2) 저녁 혹은 잃어버린 환영. 샤를 글레르. 1843년
▲ (그림 2) 저녁 혹은 잃어버린 환영. 샤를 글레르. 1843년
▲ (그림 3) 사포. 샤를 글레르. 1867년
▲ (그림 3) 사포. 샤를 글레르. 1867년

인상주의 운동에는 수많은 화가가 참여했지만, 그 중에서 모네를 제외하고 ‘순수 인상주의자’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실은 카미유 피사로와 알프레드 시슬레 뿐이다. 르누아르는 1880년대 중반에 고전주의로 돌아가 버린다. 드가는 아예 처음부터 색보다 선을 중시했고, 대다수의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플렝 에르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세잔은 1874년 최초의 인상주의전에 참가하지는 했지만 애초에 인상주의의 목표와는 거리가 먼 작가였다. 색채 효과보다는 외려 화면의 구축에 관심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피사로와 시슬레는 모네와 더불어 주는 날까지 충실한 인상주의자로 남았다. 특히 피사로는 여덟 차례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전에 빠짐없이 참여할 정도로 이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아버지’라 불렸다. 나이가 가장 많을 뿐 아니라 온화한 성품으로 그룹을 원만히 이끄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잔은 자신을 ‘피사로의 제자’라 불릴 정도로 이 덴마크-프랑스계 유대인을 존경했다. 사실 다른 멤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인상주의전에 경향이 사뭇 다른 그를 끼워준 것도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인상주의자들은 물론이고 후에 등장할 신인상주의자와 후기 인상주의자들에게까지 ‘아버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을 끝까지 인상주의자로 여겼다.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 직접 작성한 약력의 끝에 그는 이렇게 적어 넣었다. “화가로서 내 나머지 인생사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인상주의자 그룹의 역사에 속한다.”

인상주의자가 되기 전에 피사로는 쿠르베와 코로의 작품에 깊이 공감했다. 사실 이는 그리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쿠르베가 사실주의자라면, 코로는 신고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와 고전주의는 그 지향이 서로 충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로는 쿠르베와 코로의 작품을 공히 ‘회화적 진리의 진술’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코로에게서 무엇보다 바르비종 화파로서 사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코로는 다른 신고전주의자들과 달리 역사화보다 풍경화에, 그것도 상상으로 그려낸 이상적 풍경이 아닌 눈으로 목격한 진경(眞景)에 관심이 많았다. 그림을 그리러 야외로 나가는 플렝 에르의 관행은 실은 코로에게서 인상주의자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림 4, 5)

▲ (그림 4) 아침-요정들의 춤.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1850~1851년
▲ (그림 4) 아침-요정들의 춤.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1850~1851년
▲ (그림 5) 습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1860~1870년

신고전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여기서 다시 인상주의로 이행하는 경향을 보여주지만, 코로는 형태를 교란하는 인상주의의 요란한 색채 효과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아가 똑같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해도 그의 방식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코로는 야외에서 그리던 그림을 다시 스튜디오로 가져와 실내에서 완성했는데, 이는 야외에서 시작한 그림을 미리 생각한 관념에 따라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피사로는 코로와 달리 그림 전체를 야외의 현장에서 완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와 인상주의자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태양광의 일시적이며 가멸적인 효과를 현장에서 순각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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