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전통적 유화에서는 하나의 색을 칠한 후 그것이 마르면 그 위에 다른 색을 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나의 물감 층이 마르기까지 며칠에서 심지어 몇 주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마네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물감을 발라 최종적으로 얻어내려는 색깔을 곧바로 만들어내곤 했다.
이를 ‘알라 프리마’라고 하는데, 마네는 이 기법을 수련 기간에 접한 벨라스케스와 할스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마네에게 배운 이 기법을 자신들의 작업에 널리 활용하게 된다. 이 기법이 특히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대 빛과 대기의 순간적 효과를 빠르게 포착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각’의 문제라고 하는 게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곰브리치의 말대로 “한낮 옥외의 환한 빛 속에서는 둥근 형체들이 때로 편편하게, 단순히 색점들처럼 보이는 법이다.”
또 옥외에서 자연을 보면 “각자 고유한 색채를 가진 각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나 마음속에서 뒤섞이는 밝은 색조의 혼합”만이 눈에 들어온다. “주어진 순간에 우리는 눈으로 오직 한 지점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기에,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 연관이 없는 형태들의 뒤범벅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플렝 에르’와 ‘알라 프리마’는 이 새로운 지각에 적절한 회화적 표현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마네의 사실주의는 인상주의로 이행한다.

여기서 ‘새로운 지각’이란 모던의 지각, 즉 대도시의 지각을 가리킨다. 대도시에서 군중 속의 한 사람 한사람의 윤곽은 뚜렷이 지각되지 않는다. 거기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윤곽을 세부까지 뚜렷하게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대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색조의 혼합’, 혹은 ‘형태들의 뒤범벅’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롱샹의 경마]는 이런 대도시적 지각을 잘 보여준다. 전통 회화에서라면 말의 네 다리를 모두 뚜렷하게 묘사했을 것이나, 저 말들은 네 다리를 채 갖추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더 진실한 묘사인지도 모른다. 질주하는 말들은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보라. 여기서 마네는 명백히 인상주의적이다. (그림 1, 2)

▲ (그림 1) 롱샹의 경마. 에두아르 마네. 1864년
▲ (그림 1) 롱샹의 경마. 에두아르 마네. 1864년

 

▲ (그림 2)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1882년
▲ (그림 2)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1882년

하지만 마네는 인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다.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의 권유로 멕시코의 황제가 되었다가 본국의 버림을 받아 처형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당대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관심은 사실 인상주의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다.
이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가 끝까지 사실주의자로 머물렀음을 의미한다. 마네가 창안한 인상주의 기법도 실은 사실주의 정신의 산물이다. 그의 관심은 새로운 화법을 개발하는 데가 아니라, 그저 세계를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진실하게’ 그리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마네는 인상주의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전시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림 3)

▲ (그림 3)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두아르 마네. 1867년
▲ (그림 3)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두아르 마네. 1867년

5. 인상주의의 탄생

1874년 4월 파리에서 조그만,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지대한 의미를 갖는 전시회가 열린다. 사진작가 나다르의 화랑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그리고 알프레드 시슬레 등 당시 예술 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살롱전에서 거절당한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 전시회가 살롱전보다 외려 더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았다고는 하지만, 전시된 작품들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 그림의 제목에 착안하여 모네와 그의 친구들을 ‘인상주의자’라 불렀다. 여기서 ‘인상’이라는 말은 물론 명백히 부정적 뉘앙스를 띤다. 모네의 그림이 벽지 문양의 밑그림만도 못한 막연한 인상에 불과하다는 혹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네와 그의 친구들은 기꺼이 이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욕설로 사용되었으나 ‘인상주의(impressionnisme)’ 라는 말은 사실 모네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모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얼룩덜룩한 색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시각적 인상들이 그의 캔버스의 유일한 제재(?)였다. 훗날 세잔은 모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하나의 눈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 (그림 4)

▲ (그림 4)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 1872년
▲ (그림 4)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 1872년

세잔이 말한 ‘눈’이란 결국 ‘지각’을 말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 새로운 지각의 방식은 이미 마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마네에게는 제재가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졸라의 말을 기억해보라.
이는 프랑스 회화가 이미 ‘제재’보다 ‘화법’을 더 중시하는 형식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모네는 마네에게서 나타나는 이 경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아예 회화를 ‘장면과 대상이라기보다는 색채와 형태’의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는 물론 마네의 의도를 한참 넘어선 것이다. 마네는 어디까지나 장면이나 대상의 ‘진실한’ 묘사를 추구하는 사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덟 차례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전(1874-1882)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러 야외로 나갈 때 사실주의자와 인상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바르비종의 화가들은 ‘제재’를 찾아서 야외로 나갔다. 그들은 야외에서 농민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후 화실로 돌아와 실내에서 채색을 하곤 했다.

반면에 인상주의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외광을 쫓아서 야외로 나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재가 아니라 빛의 효과였기에, 그들은 현장에서 신속하게 스케치를 한 후 바로 채색에 들어가곤 했다. 이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해준 것은 1840년대에 발명된 튜브 물감이었다. 튜브 물감이 없던 시절에는 원하는 색의 물감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채색을 화실 안에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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