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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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는 흔히 인상주의자로 소개되곤 하나, 정작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사실주의자’로 여겼다. 그가 인상주의 화가들과 폭넓게 교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들과의 만남을 가벼운 친교 모임으로 생각했을 뿐, 그들이 주도하는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물론 마네의 작품에는 전반적인 사실주의 기조 속에서도 외광파(外光派)의 특성이나 주관적 인상의 강조와 같은 인상주의적 요소가 존재한다.
이것이 후에 인상주의자가 될 젊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렇기에 그가 오늘날 ‘인상주의의 아버지’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마네는 본격적인 인상주의자라기보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 봐야 한다.

판사인 마네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전공하기를 원했다. 미술을 향한 그의 열정을 이해해준 것은 삼촌인 에드몽 푸르니에였다. 1845년에 그는 삼촌의 권유로 드로잉 코스를 다니며, 거기서 장래 예술장관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사귄다. 3년 후 아버지의 권유로 리우데자네이루로 항해를 하기도 하나, 해군사관학교 입학에 두 번이나 낙방한 후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미술교육을 받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1850~1856년 사이에 마네는 아카데미의 역사화가인 토마 쿠튀르에게 사사(師事)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를 여행하며 프란스 할스나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와 같은 대가의 영향을 받는데, 이들은 후에 마네가 고유의 화법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화가로서 마네의 첫 대작은 명확히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스승 쿠튀르의 아카데미 화법을 버리고 제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는 파리의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넝마주이의 모습을 담았다. 그림의 주인공인 당시 루브르 근처에 자주 출몰하던 알코올중독자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압생트가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기말 프랑스 미술에서 압생트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당시에 이 술이 마약만큼 중독성이 강한 부도덕한(?) 음료로 잘못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1)

▲ (그림 1)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에두아르 마네. 1859년
▲ (그림 1)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에두아르 마네. 1859년

마네는 이듬해인 1859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하나 전시를 거절당한다. 심사위원 중에서 오직 들라크루아만이 이 작품에 호의를 표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엿보이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역시 쿠르베에게서 유래한 사실주의 정신이다. 이 시기에 마네는 사실주의자로서 주로 집시·거지·가수 등의 모습이 담긴,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장면을 화폭에 옮겼다.
하지만 마네가 즐겨 그린 제재 중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길거리 카페나 레스토랑의 풍경이다. 이 제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 시기의 그는 쿠르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마네는 이른바 ‘모던’ 라이프를 그린 최초의 화가였다. 전원에 사는 것을 선호한 다른 화가들과 달리 할 일 없이 대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거리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는 ‘만보객’이기도 했다.
[튈르리에서의 음악회]는 파리의 만보객들이 즐겨 모인 튈르리 공원의 하루를 보여준다. 윤곽의 명확성이나 묘사의 세밀함을 포기한 데에서 이미 인상주의적 경향이 엿보인다. 당시의 대중에게 이 기법은 너무나 생소하여 평론가들에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평을, 대중들에게는 협박에 가까운 항의를 받아야 했다. 오직 소설가 에밀 졸라의 예리한 눈만이 이 기법의 바탕에 모던의 새로운 지각 방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림 2)

▲ (그림 2) 튈르리에서의 음악회. 에두아르 마네. 1862년
▲ (그림 2) 튈르리에서의 음악회. 에두아르 마네. 1862년

대도시의 군중을 볼 때 우리 눈은 어느 한 사람의 윤곽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그렇기에 무리 속의 인간들이 우리 눈에는 얼룩덜룩한 색점으로 비치게 마련이다. 마네의 작품은 바로 그런 도시적 지각 방식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졸라는 대중에게 이 작품을 볼 때에는 ‘존중할 만한 거리’를 두라고 권고한다. 가까이서 보면 얼룩으로 보여도 조금 떨어져서 보면 거기서 대상의 윤곽이, 나아가 튈르리의 풍경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전형적인 인상주의 효과다.

마네는 전통적인 역사화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당대의 현실에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풀밭 위의 점심]은 전통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원래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원작에 기초해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제작한 동판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서 마네는 아득한 과거의 신화적 사건을 슬쩍 당대의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과거는 현재로, 신화는 현실로, 신들은 인간들로 대체된다. 원래 풍속화는 작은 포맷으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 마네는 역사화에나 사용되는 208×264.5cm의 대형 포맷을 사용했다. 그로써 역사화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림 3, 4, 5)

▲ (그림 3) 풀밭 위의 점심. 에두아르 마네. 1863년
▲ (그림 3) 풀밭 위의 점심. 에두아르 마네. 1863년
▲ (그림 4) 파리스의 심판.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1510~1520년
▲ (그림 4) 파리스의 심판.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1510~1520년
▲ (그림 5) 파리스의 심판(부분).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1510~1520년
▲ (그림 5) 파리스의 심판(부분).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1510~1520년

이 작품은 결국 살롱전에서 전시를 거부당한다. 결국 마네는 이 작품을 살롱전에서 거정당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낙선전’에 출품한다. 작품이 공개되자 사회에서는 커다란 스캔들이 일어났다. 미술사에서 이 작품은 스캔들을 통해 예술적 명성에 도달하는 ‘모던’의 전략이 의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예로 알려져 있다. 정장을 차려입은 두 사내가 전라와 반라의 여인들과 공공의 장소에서 피크닉을 즐긴다는 설정 자체가 외설적이다.
나아가 그림에 사용된 기법 역시 당시 대중의 이해력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때까지 화가들은 그림을 실물처럼 보이게 하려고 붓칠의 흔적을 지우려 했으나 마네는 거친 붓 자국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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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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