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9)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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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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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혁신을 위해 과거로

본 지는 이번호부터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물론 라파엘전파의 특성을 그저 묘사의 ‘자연주의’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영국 예술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예술의 지성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전통 속에서 탄생했기에 라파엘전파의 작품 역시 대부분 역사화다. 그림으로 정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그림 속에 이야기가 있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만 라파엘전파의 경우 전통적 제재 외에 과거와 당대의 문학작품에서 폭넓게 제재를 취하곤 했다. 라파엘전파에게 자연주의적 묘사는 자기 목적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의 묘사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기에, 그들의 작품은 자연스레 상징주의적 특성을 띤다.

콰트로첸토 풍으로 그려진 로세티의 [성처녀 마리아의 소녀 시절]은 온통 중세적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다. ‘알레고리’란 원래 ‘다른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저 그림에 묘사된 대상들 역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동시에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닥에 깔린 종려나무와 가시나무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바닥에 쌓인 책 더미는 믿음과 소망의 미덕을, 그 위에 놓인 꽃병 속의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한다.

로세티의 이 ‘중세주의’는 이른바 ‘옥스퍼드 운동’과 관련이 있다. 옥스퍼드 운동은 제도 교회에서 사라진 기독교 정신을 회복하려는 정신 운동으로, 로세티는 이 개혁운동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림 1)

▲ (그림 1) 성처녀 마리아의 소녀 시절.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49년
▲ (그림 1) 성처녀 마리아의 소녀 시절.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49년

두 번째 대작 [주님의 여종을 보라]는 전통적인 ‘수태고지(受胎告知)’의 장면을 보여준다. 인물의 머리에 후광을 두르거나 붉은색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백합으로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 등은 중세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혁신’의 요소가 있다면, 마리아가 기도를 하다가 천사의 방문을 받는 전통적 성화에서와 달리, 마리아가 침대에서 잠옷을 입은 채 천사를 맞는다는 점이다. 가브리엘 역시 얇은 가운 속으로 알몸을 드러내고 있고, 심지어 어깨에 날개조차 달고 있지 않다.

이 사실주의적 경향이 당대의 평단에서 밀레이의 [부모의 집에 있는 예수]만큼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소심한 로세티는 그 이후 제 작품의 전시를 꺼리게 된다. (그림 2)

▲ (그림 2) 주님의 여종을 보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49~1850년
▲ (그림 2) 주님의 여종을 보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49~1850년

아서 왕의 이야기 등 주로 중세를 향했던 로세티의 눈이 딱 한 번 당대를 바라본 적이 있다. [발견되다]는 송아지를 팔러 도시로 온 어느 농부가 우연히 길에서 창녀가 된 지인, 혹은 과거의 연인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인은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사내의 눈길을 피하려 한다. 수레 위에 그물로 덮인 송아지가 매춘부 생활에 빠진 여인을 상징하는 듯하다.

과연 그녀는 저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까? 당대의 현실을 그렸지만 이 작품은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여성을 매매춘으로 몰아넣은 현실을 고발하는 게 아니라 외려 매매춘에 빠진 여성의 도덕성을 질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난 것은 빅토리아 왕조의 엄격한 도덕주의다. (그림 3)

▲ (그림 3) 발견되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54~1855년
▲ (그림 3) 발견되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54~1855년

정밀한 세부와 생생한 색체, 그리고 풍부한 상징주의라는 라파엘전파의 전형적 특징은 윌리엄 홀먼 헌트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의 빛]은 [신약성서-요한계시록]의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다.

헌트는 이 그림을 “그저 좋은 제재로서가 아니라 신성한 명령에 따라 그렸다”라고 한다. 저 문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아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다. 그 문은 물론 굳게 닫힌 우리 마음의 상징으로, 결국 그리스도는 늘 우리의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를 다니는 이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알레고리다. (그림 4)

▲ (그림 4) 세상의 빛. 윌리엄 홀먼 헌트. 1851~1853년
▲ (그림 4) 세상의 빛. 윌리엄 홀먼 헌트. 1851~1853년

이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 [깨어나는 양심]이다. 헌트는 이 작품을 앞의 것의 ‘물질적 대응물’이라 불렀다. 이 작품은 [구약성서-잠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앞의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의 상징주의는 명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사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여인이 갑자기 무슨 깨달음을 얻은 듯 무릎에서 일어난다.

여인의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이로 보인다. 도대체 이게 무엇을 상징할까? 나아가 이 장면과 [잠언]의 말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림 5)

▲ (그림 5) 깨어나는 양심. 윌리엄 홀먼 헌트. 1853년
▲ (그림 5) 깨어나는 양심. 윌리엄 홀먼 헌트. 1853년

라파엘전파의 이론적 옹호자인 존 러스킨은 ‘세상의 모든 것은 읽을 수 있는 기호’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온갖 상징으로 가득차 있다. 이를테면 탁자 아래에서 날개 부러진 새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는 여성의 곤경을 상징하고, 바닥에 버려진 장갑 한 짝은 후에 매춘부가 될 여성의 운명을 암시하며, 바닥에 헝클어진 실타래는 저 소녀가 걸려든 거미줄을 시사하고, 피아노 위의 자명종과 금송화는 경고와 슬픔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헌트의 상징주의는 중세의 알레고리처럼 도상학적으로 명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아, 보는 이에게 다양한 해석을 허용한다. 어쩌면 19세기 말의 상징주의, 20세기 예술의 상징적 성격이 여기서 전조를 드러냈는지도 모른다.

라파엘전파는 혁신을 위해 과거로 돌아갔다. ‘모더니즘’의 시각에서는 라파엘전파보다 프랑스의 사실주의자들의 전략이 더 수미일관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프랑스 화가들이 라파엘전파보다 ‘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는 것은 일면적 평가일 수 있다.

왜냐하면 라파엘전파의 상징주의는 비록 중세의 알레고리로 돌아가려는 복고적 취향의 산물일지라도, ‘가시적인 것의 재현을 넘어 비가시적인 것의 표현’을 지향하는 현대 추성회화의 상징적 특성과 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라파엘전파의 ‘복고를 통한 혁신’이 역설적으로 혁신 일변도의 사실주의보다 외려 더 혁신적 결과를 낳은 셈이다.

형식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라파엘전파는 콰트로첸토로 돌아가는 가운데 원근법의 규약을 파기했다. 1400년대에는 원근법의 기하학적 원리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오직 경험적 원근법만 존재했다. 그 시절의 화가들도 경험을 통해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리에 따라 사물의 크기가 어떤 비율로 줄어드는지 알지 못했고, 당연히 화면의 대각선들이 한 지점(소실점)으로 모여야 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콰트로첸토의 회화에서는 하나의 화면에 여러 개의 소실점이 공존하게 된다. 라파엘전파의 작품 속 공간 구성이 우리 눈에 왠지 어색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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