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럽의 시대정신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멘첼이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주의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상수시 궁전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와 [상수시 궁전 프리드리히 대왕의 둥근 탁자],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병사들] 등 프리드리히 대왕의 삶을 담은 일련의 ‘역사화’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보다 한 세기 전의 인물이므로, 그림 속의 장면들은 당연히 관찰에 기초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화가가 상상력으로 구축한 허구일 수밖에 없다. 멘첼은 이 프리드리히 연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1853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고, 3년 후에는 그곳의 교수로 선임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아카데미에 경멸을 표했던 쿠르베와는 구별된다. (그림 1, 2)

▲ (그림 1) 상수시 궁전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 아돌프 폰 멘첼. 1850~1852년
▲ (그림 1) 상수시 궁전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 아돌프 폰 멘첼. 1850~1852년
▲ (그림 2) 상수시 궁전 프리드리히 대왕의 둥근 탁자. 아돌프 폰 멘첼. 1850년
▲ (그림 2) 상수시 궁전 프리드리히 대왕의 둥근 탁자. 아돌프 폰 멘첼. 1850년

1850년대에 사실주의는 이미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비록 멘첼이 그린 것은 역사화였지만, 그 안에도 이미 사실주의적 면모가 엿보인다. 첫째는 정교한 세부 묘사다. 당시 멘첼은 이 충실한 묘사에 힘입어 명성을 누렸다.
둘째는 대왕의 모습을 실제 삶에 가깝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전통적 역사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면을 담았다면, 멘첼은 대왕이 플루트 연주를 하거나 탁자에 둘러앉아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일상의 장면을 그렸다.
셋째는 설사 역사적 사건을 다루더라도 군주를 영광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호크키르히에서처럼 패배한 전투, 혹은 이긴 전투라 하더라도 승산이 없어 보이던 절망적 국면에 처한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병사들]에 묘사된 것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아 부랴부랴 진용을 갖추느라 허둥대는 모습이다. 여기서 화가의 의도가 군주의 업적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기록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 그림을 그릴 땐 멘첼은 장면에 사실적 효과를 더하기 위해 작전 보고서 등 여러 사료를 두루 참고했다고 한다.

물론 프리드리히 연작 역시 엄연히 역사화인 이상 어느 정도 이상화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멘첼은 프리드리히를 상대화․인간화하는 방식으로 되도록 영웅화․이상화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렇기에 왕가나 보수적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림 3)

▲ (그림 3)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병사들. 아돌프 폰 멘첼. 1850~1856년
▲ (그림 3)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병사들. 아돌프 폰 멘첼. 1850~1856년

멘첼이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제국을 수립한 이후의 일이다. 당시 유럽에 강력히 대두하던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배경으로 멘첼은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화가’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그를 가리켜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군대의 명성을 드높인 자’라 불렀다.

하지만 멘첼은 자신을 독일의 애국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를 국민을 지배하는 절대군주가 아닌 국민에 봉사하는 계몽군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멘첼의 이름은 주로 ‘프리드리히 대왕 이야기’와 결부되곤 한다. 그렇지만 이 연작은 사실 멘첼의 작품 세계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멘첼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사실주의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은 18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당대의 일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소시민과 부유층, 그리고 철강 노동자 등 당대의 이름 없는 인물들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압연 공장]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산업혁명이 낳은 새로운 계급, 즉 산업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도 자신들의 노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존재로 나타난다. 비록 그가 당시에 막 발생한 노동운동에 공감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적어도 이 계급이 앞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막연한 예감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4)

▲ (그림 4) 압연 공장. 아돌프 폰 멘첼. 1872~1875년
▲ (그림 4) 압연 공장. 아돌프 폰 멘첼. 1872~1875년

[무도회 만찬]이나 [야외 맥줏집에서]와 같은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도래한 ‘모던’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이다. [무도회 만찬]은 한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미끄러지는 접시를 떨어지지 않게 다시 잡아채는 순간을 포착했다. ‘모던’의 일상을 제재로 취한 것이나 흘러가는 순간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미 인상주의적 특징을 띠고 있다.

실제로 드가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연습을 위해 종종 멘첼의 그림을 베껴 그리곤 했다. [야외 맥줏집에서]는 마치 전체 그림에서 한 부분만 잘라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카메라의 효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회화의 수단으로 촬영한 ‘모던 라이프’의 스냅사진이라 할 수 있다. (그림 5, 6)

▲ (그림 5) 무도회 만찬. 아돌프 폰 멘첼. 1878년
▲ (그림 5) 무도회 만찬. 아돌프 폰 멘첼. 1878년
▲ (그림 7) 야외 맥줏집에서. 아돌프 폰 멘첼. 1883년
▲ (그림 6) 야외 맥줏집에서. 아돌프 폰 멘첼. 1883년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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