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미술의 붕괴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하지만 사실주의 작가라 하여 모두 쿠르베나 도미에처럼 강한 정치적 성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바르비종 화파’에 속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은 강한 민중 결속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 1, 2)

▲ (그림 1)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 1857년
▲ (그림 1)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 1857년
▲ (그림 2) 감자 심는 사람들. 장 프랑수아 밀레. 1861년
▲ (그림 2) 감자 심는 사람들. 장 프랑수아 밀레. 1861년

사실 쿠르베 자신도 시민으로서는 혁명에 공감하고 적극 참여했으나, 정작 작품들에서는 그리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바리케이드]를 제외하면 직품 대부분이 정치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인물화나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프로파간다 예술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림 3)

▲ (그림 3)  바리케이드. 귀스타브 쿠르베. 1848년
▲ (그림 3) 바리케이드. 귀스타브 쿠르베. 1848년

쿠르베의 ‘현대적’ 면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요소는 독립적인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다. ‘아카데미’나 ‘에콜 데 보자르’와 같은 제도권 예술에서는 고대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라고 권했다. 고대의 모방을 통해 그들만큼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쿠르베 역시 고대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존재했던 거의 모든 예술의 언어를 두루 섭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조차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쿠르베가 전통을 깊이 연구한 이유는 그것을 잇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자신의 개성’에 대한 ‘독립적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독립적 의식을 가지고 전통에 거리를 취하는 것은 예술적 ‘현대’의 전형적 특징이다. 전통의 파괴는 스캔들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1855년 쿠르베는 또 하나의 사실주의 걸작 [화가의 작업실]을 그린다. (그림 4)

▲ (그림 4) 화가의 작업실. 귀스타브 쿠르베. 1855년
▲ (그림 4) 화가의 작업실. 귀스타브 쿠르베. 1855년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주의적이라 할 수 없다. 그려진 것은 일상의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사실주의회화가 아니라 일종의 메타 회화, 즉 사실주의 ‘회화의 회화’다.

화면 안에는 미술의 모든 장르가 다 들어 있다. 그 안에는 인물이 있으며, 풍경이 있으며, 정물이 있으며, 풍속이 있다. 거대한 캔버스 앞에 붓을 들고 앉아 있는 이는 물론 화가 자신이다. 화가의 뒤에 서 있는 여인은 그의 창작에 영감을 주는 사실주의의 뮤즈다. 그녀는 왜 벗고 있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종종 ‘진실’이라는 말 앞에 ‘벌거벗은’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화면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른쪽에는 그의 예술의 정신적․물리적 지원자들이 서 있다. 사실주의 미학의 수립자 샹플뢰리, 그의 열광자인 시인 보들레르, 그와 정치적으로 교감한 무정부주의자 프루동, 그리고 재정적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 왼쪽에 서 있는 것은 사제․창녀․산역꾼․상인 등 ‘사소한 일상생활의 또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샹플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쿠르베는 이들을 ‘비참함, 가난, 부유함,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들, 늘 죽음과 대면하며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어쩌면 오른쪽의 인물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이름 없는 민중들인지도 모른다. 이들이야말로 그의 예술을 있게 해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 유럽의 시대정신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은 1844년에서 1857년 사이에 벌어진 ‘사실주의 논쟁’이었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화가의 작업실]에도 등장하는 비평가 샹플뢰리. 문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실주의 논쟁은 ‘사실주의의 얼굴’이라는 쿠르베를 통해 미술계로까지 급속히 번진다. 당시에 사실주의를 향한 비평가들의 전형적 비난은 ‘추’를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1855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는 쿠르베의 몇몇 작품의 전시를 거절한다. 그러자 그는 박람회장에 개인적으로 ‘사실주의관’을 지어 거절당한 작품들을 포함해 그동안 그려온 일련의 사실주의 회화를 전시한다. 이는 사실주의 운동에서 기념비적 사건이 된다.

사실주의 운동은 곧 프랑스에서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다. 이웃 독일에서 쿠르베에 견줄 만한 역할을 한 사람은 아돌프 폰 멘첼이었다. 멘첼 역시 1848년 혁명에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3월 베를린의 봉기가 진압된 직후 카셀에 있던 그는 희생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베를린으로 달려간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3월 혁명 희생자들의 시신 안치]다. (그림 5)

▲ (그림 5) 3월 혁명 희생자들의 시신 안치. 아돌프 폰 멘첼. 1848년
▲ (그림 5) 3월 혁명 희생자들의 시신 안치. 아돌프 폰 멘첼. 1848년

정면에 보이는 것은 장다르멘마르크트의 독일 대성당, 성당 계단에는 봉기에서 희생된 183명의 관들이 놓여 있다. 한 희생자의 관이 들어올 때 그 자리에 참석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화면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모자를 벗어 든 왕의 모습이 보인다.

미완성으로 남은 이 작품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 회화사에서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그려낸 최초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훗날 멘첼은 이 날을 회고하며 “아마도 그날이 그(왕)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날이었을 것”이라 말한다. 동시대의 사건을 통해 당대의 권력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명백히 사실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주의 회화치고 세부의 묘사가 그리 선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서 있는 인물들은 물론이고 뒤로 보이는 성당 건물의 세부, 특히 삼각형 모양의 팀파논에 새겨진 부조들이 흐릿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수십 년 앞서서 미리 인상주의적 효과를 도입한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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