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미술의 붕괴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이렇게 회화의 제재로 채택된 이야기를 ‘이스토리아(istoria)’라 부른다. ‘이스토리아’를 흔히 ‘역사(history)’로 옮기곤 하나, 그 말의 원뜻은 ‘이야기(story)’에 더 가깝다.

미술사에서 말하는 ‘역사화’란 역사적 위인을 다룬 회화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성서든, 신화든, 역사든, 그 안에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그림은 모두 ‘역사화’라 불린다.

이처럼 미술이 문학에, 즉 이미지에 텍스트에 종속되어 있던 시대에는 그림의 품격이 주로 그 바탕이 되는 텍스트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그 시절에는 다루어지는 제재의 중요성에 따라 장르 사이에 위계가 존재했다. 그 서열의 맨 위에 있는 것이 ‘역사화’다.

▲ (그림 1) 자화상.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1661년
▲ (그림 1) 자화상.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1661년

아무래도 그림 안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편이 도덕적 교훈이든, 종교적 교훈이든 정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유리할 게다.

역사화의 바로 아래를 차지하는 것은 ‘인물화’다. 비록 이야기가 없더라도 초상이나 자화상은 적어도 인물의 외관을 통해 내면의 정신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화가들의 초상, 특히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생각해보라. <그림 1>

인물화 아래에 있는 것은 ‘풍경화’다. 중세까지만 해도 풍경은 그림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다. 풍경은 르네상스 이후에 독립적 장르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 시기부터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이 본격화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게다.

풍경화는 정신성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품격 있는 장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를 만화하기 위해 화가들은 종종 풍경 속에 이야기를 집어넣곤 했는데, 이를 ‘역사적 풍경’이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푸생이 그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이다. 언뜻 순수한 풍경으로 보이는 이 그림 속에는 깨알 같은 크기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들어 있다. <그림 2>

▲ (그림 2)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 니콜라 푸생. 1648년
▲ (그림 2)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있는 풍경. 니콜라 푸생. 1648년

풍경화 아래로는 ‘정물화’가 있다. 사실 고전주의자들은 정물화를 저속한 장르로 여겨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림 3>

정물화는 주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상업자본주의가 등장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게다. 화가들은 언제나 자기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리게 마련이다. 네덜란드에서 정물화가 유행한 것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물로 매우 소중이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림 3) 정물. 피터르 클라스. 1627년
▲ (그림 3) 정물. 피터르 클라스. 1627년

즉, 그들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소유한 물건을 그림으로 그려 미학적으로 또 한 번 전유하려 한 것이다.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본주의적 소유욕의 당당한 긍정이다.

고전주의자들은 소유욕을 저급한 욕망으로 여겼다. 그런 그들이 ‘정물화’ 못지않게 경멸한 것이 ‘풍속화’다. 현실을 떠나 이상의 세계에 살았던 그들은 서민의 비루한 일상 따위는 예술적으로 묘사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성서와 신화, 그리고 역사의 세계를 향한 고상한 시선에 어디 밑바닥 민중들의 삶이 보였겠는가. 평범한 민중을 예술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네덜란드의 풍속화는 먼 훗날 도래할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예술적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

굳이 19세기까지 갈 것도 없이 예술의 ‘현대’는 어쩌면 이때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1. 고전미술의 붕괴

앞에서 고전미술의 이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미술에 현대성이 관철되는 과정은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고전적 예술 이념이 무너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전미술의 붕괴는 19세기 중엽에 사실주의와 더불어 시작된다. 이는 ‘미술’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사실주의를 미술 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외려 쥘 샹플뢰리나 에드몽 뒤랑티와 같은 문필가들이었다. 문학의 영역에서 사실주의 운동은 스탕달과 발자크의 소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에 미술에서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사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귀스타브 쿠르베다.

▲ (그림 4) 절망적인 남자. 귀스타브 쿠르베. 1843~1845년
▲ (그림 4) 절망적인 남자. 귀스타브 쿠르베. 1843~1845년

사실주의는 한마디로 고전적 예술 이념에 대한 안티테제라 할 수 있다. 19세기 초반 예술의 주류로 행세하던 것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이었다.

전자는 차가운 이성을, 후자는 열정과 상상력을 강조하지만, 두 흐름 모두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고전적 예술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고전주의는 신화․성서․역사라는 전통적 제재(이스토리아)를 고수한 반면, 낭만주의는 상상을 자극하는 기이하거나 이국적인 사건에 집착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흐름 모두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사실주의자들은 달랐다. 이들의 눈은 과거의 영광이나 이국적 풍경이 아닌 지금 여기의 비루한 ‘현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대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쿠르베 역시 처음에는 낭만주의자로 출발했다.

그의 유명한 자화상은 좌절에 빠진 고독한 천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 4> 그림 속의 인물은 마치 액자 밖으로 튀어나와 관찰자에게 달려들 것처럼 보인다.

▲ (그림 5) 두려움으로 미쳐버린 남자. 귀스타브 쿠르베. 1844-1845년
▲ (그림 5) 두려움으로 미쳐버린 남자. 귀스타브 쿠르베. 1844-1845년

같은 시기에 그려진 또 다른 작품에서는 중세인의 복장을 한 채 절벽의 끝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려 한다. <그림 5>

여기에서 그는 격정 끝에 마침내 미쳐버린 낭만적 영웅으로 묘사된다. 격정의 순간을 마치 스냅사진 찍듯이 포착한 생생한 묘사에서는 벌써 사실주의 회화의 특성이 엿보이나, 자신을 영웅화하여 과장된 제스처에 격렬한 감정을 담아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낭만주의 회화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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