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초기 그림들에게서는 그 산이 상당히 멀리 보이며, 넓은 파노라마 속에 자리한 그 위치 때문에 그 모습은 보다 큰 평온함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 세잔느는 봉우리에 보다 가까이 접근했지만, 봉우리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도달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 있다.(그림 1)

▲ (그림 1) 비베뮈 채석장에서 바라본 생트 빅투아르 산. 세잔느. 1897년경. 81×65cm. 볼티모어 미술관
▲ (그림 1) 비베뮈 채석장에서 바라본 생트 빅투아르 산. 세잔느. 1897년경. 81×65cm. 볼티모어 미술관

그는 관찰자의 시점을 계곡 위에 매달아 두는 대신, 자기와 주 대상 사이에 채석장이라는 하나의 심연을 두고 그 곳의 공허를 가로질러 반대편의 바위들과 치솟은 봉우리를 바라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풍경 그 자체는 극적인 것으로 변하며 용솟음치는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이 힘들은 관찰자의 영역 밖에 있으며 접근할 수가 없다.

산은 영웅적인 조각상처럼, 나무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암석대좌 위에 놓여 있다. 한쪽 능선은 매끄러운 경사를 이루며 솟아오르고 이상하게 활기를 띤 다른 쪽 선은 수차례의 돌연한 끊김으로 그 흐름이 바뀐다.

처음으로 우리는 그 봉우리를 뚜렷한 옆모습을 지닌, 혹은 인간의 얼굴처럼 양면을 지닌 인격적 대상으로 본다. 그것은 이전의 고전적 균제를 상실하고 복잡하며 역동적인 형태가 되었다.

동시에 그 상승감과 긴장된 상향운동은 공간 속에서의 그 위치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 위치는 캔버스의 위쪽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으며, 채석장의 수직 벽돌 바로 위에 있다.

자연의 피라미드를 진정시키는 광활한 수평면이나 거대한 대지는 없지만, 불룩한 바닥 위에 난 깊은 수직의 균열이 채석장 벽을 두 쪽으로 가르고, 또 그것이 불안정하게 기울어진 나무줄기들에 의해 두드러지면서, 엄청난 압력과 열기로 된 이 배경 속의 들뜬 효과를 높이고 있다.

산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물들만큼이나 뚜렷하여, 그 윤곽선은 아래쪽 나무들의 보다 흐릿한(때로는 사라지는) 음영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분명하기까지 하다. 대상들은 전경에서 원경으로 이동함에 따라 원시미술의 감정적 원근법에서처럼 점점 더 커진다.

오른쪽 상단의 커다란 나무는 산과 동일한 공간영역에 속하는 듯이 보이는데, 캔버스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줄기의 파상선을 쫓아갈 때에만 우리는 그것이 전경에서 차지하는 참된 위치를 알 수 있게 된다.

전경과 원경에 나타난 아주 비슷한 녹색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평면들을 공통된 양식으로 통합한다. 오렌지색 바위와 파란 하늘이 이루는 가장 강한 대비의 화음 역시 가장 먼 공간과 가장 가까운 공간을 결합시킨다.

연자주색, 장미색, 자주색조들의 범위는 동일한 깊이를 가로질러 펼쳐진다. 이 근접시각은 정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보다 큰 강도의 감각과 관련된다. 오렌지색과 파란색이 이처럼 넓고 찬란한 대비를 이루며 구사된 풍경화는 세잔느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상들에 관한 착상에는 아름다운 질서가 있다. 수평의 영역 속에서 층층의 나무로부터 보다 조밀한 한 쌍의 바윗덩이를 지나 하나이면서도 대칭으로 형성된 봉우리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봉우리는 바위와 나무의 형태를 종합한다.

이러한 이행 속에서 축은 중앙의 나무로부터 바위의 수직적인 입구로 이동했다가 아래쪽 삼각형 나무와 나란한, 산의 내부의 그려지지 않은 축으로 돌아온다.

▲ (그림 2) 양파가 있는 정물. 세잔느. 1895년경. 66×8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그림 2) 양파가 있는 정물. 세잔느. 1895년경. 66×8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양파가 있는 정물에는 거대한 구축적 요소,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넓은 빈 벽 등이 빽빽이 들어찬 작은 곡선, 경사진 형태, 멋대로 놓여진 야채를 등과 결합되어 있다.(그림 2)

둥글고 현란한 형태들 또한 탁자의 부채꼴 테두리나 병과 유리컵의 윤곽선에서와 같이 가장 엄정하고 가장 안정된 대상들을 만들어 낸다.

이 그림은 세잔느의 가장 주목할 만한 구성들 중의 하나이며, 극적이거나 절정에 이르는 일 없이 음악적 수법으로 펼쳐지는 선들의 창조적 전개이며, 가라앉은 대기적 기조 속에 놀랍도록 미묘한 터치와 세련되고 풍부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가장 진지한 명상의 결과로서 명상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이 그림은 곰곰이 생각하고 탐구해야 할 작품이다.

형식적 주제가 되는 주 요소는 양파인데, 그 모양은 사과보다 더욱 복잡하며 대단히 유연한 선과 특히 보다 개방적인 파상 형태를 통해 세잔느의 후기 양식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축들, 색채 반점들, 이웃사물과의 접촉 등을 통해 열리고 닫혀진 무리들 속에서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따라가면서 그 양파 형식들의 전개를 추적한다.

이 양파들은 탁자의 부채꼴 테두리(불록과 오목의 모호한 짝을 이루고 있으며, 양파들의 유사한 곡선보다 더 크게 벌어져 있는)나 천, 병, 유리잔 등의 굽이치는 실루엣과 어울려 어떤 지점에서 일치되는 뚜렷한 평행적인 멜로디 체계를 형성한다.

이 그림에는 수많은 경쾌하고 미묘한 터치들이 있다. 아마도 모든 붓질은 똑같이 정돈된 수법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구태여 어떤 하나를 골라내는 것은 작의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같은 부분 안에서 몇 가지 예들을 지적할 수도 있다.

아름답게 채색된 포도주잔을 살펴보자. 중심축이 오른쪽으로 치우친 그 포도주잔의 받침대는 잔 전체를 엄격한 배열에서 변경시켜 아래쪽 탁자 모서리의 두 개의 부채꼴 곡선이 만나는 중요한 지점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이 곡선들은 유리잔의 받침대와 병의 밑둥의 형태와 연관된다. 이 유리잔은 그 기울어진 받침대와 그 왼쪽 상부의 삭제된 타원의 윤곽선을 통해, 마치 기울어진 꼭지를 가진 몇몇 양파들처럼 섬세하게 기울어진 듯이 보이며 병, 유리잔, 쟁반 위의 양파 등이 이루는 사선적인 군집을 강화시킨다.

또 다른 미묘하고 이해하기 힘든 착상은 유리잔(그리고 병에도) 안에 그려진 수평선들이다. 이것들은 탁자의 선이 은밀하게 다시 나타난 것으로 벽의 오른쪽 하부의 수평선들과 천의 주름 사이로 노출된 탁자의 부분과 관련된다. 이 모든 단편들이 합쳐져 비례에 맞는 간격을 지닌 단계적 연속을 형성한다.

유리잔 자체는 그 뒤로 비치는 양파와 함께 놀라운 한 편의 냉정한 그림으로서 그 속의 터치 하나하나마다 영감에 찬 과단성과 정확성으로써 구사되어 있다. 즉 그것이 구축해내는 이 조화의 특수한 구조와 연관되어 그것은 여기에서만 그렇게 그려질 수 있었다.

 

 

이번호를 끝으로 세잔느의 미술이야기는 마무리 합니다. 다음 호부터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 편’이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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