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일군의 후기 회화에 속하는 작품으로, 우수에 잠긴 젊은이를 그린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한 소년이 해골을 곁에 두고 탁자에 앉아 있는 작품이 있다. 여기서는 맥이 풀린 자세와 바로 곁으로 둘러쳐진 묵직하게 늘어진 휘장 등이 억눌린 몽상의 분위기를 전달한다.(그림 1)

▲ (그림 1)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세잔느. 1888~1890년. 73×92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 (그림 1)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세잔느. 1888~1890년. 73×92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년은 자기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막들과 본질적으로 닮은 복장으로 휘감겨 있어서, 자신의 공간 속에 매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붉은 조끼도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강한 색채의 이 예외적인 핵심은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색과 보라색으로 향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타이와 장식띠의 청색은 어두운 회색조를 띠고 있다. 한 손은 엉덩이에 대고 다른 손은 늘어뜨린 이완된 동작과 순간적인 휴식의 자세는 수동성과 연약성을 나타내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흐늘흐늘하고 무기력한 팔과 비교하여 사지의 균형 잡힌 기울기가 갖는 미묘함과 반복적인 사선적 형태들로 이루어진 휘장의 크나큰 힘을 측정한다.

애상적 우아함을 지닌 길쭉하고 침울한 인물은 내성과 회의가 행동을 구속하던 16세기의 귀족적인 이탈리아 초상화들을 상기시킨다.

소년의 용모는 희미하긴 하지만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의 수줍음과 괴로운 내적 삶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흐릿하게 그려진 입술은 저 멀리 날아가는 새의 날개 같다.

이처럼 차분한 감정의 기조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전성기 르네상스 대가들에게 찬탄하는 것 같은 형태의 우아한 크기와 세잔느만이 할 수 있는 활기찬 붓질을 통해 실현된 색채의 멋진 공명성과 생명감 때문에 당당하고 힘차다.

분명하게 배열되고 형식화된 그 구성 속에서 균형 잡힌 구조로 된 소년의 연약한 신체가 길고 율동적인 형태의 휘장이나 의자와 번갈아 대비되고 있다. 휘장의 왼편은 곧고 오른편은 곡선인데, 신체는 왼편이 더 구부러져 있으며 오른쪽은 경직되어 있다.

아주 신중하게 고려된, 이처럼 고도로 상상적인 구성은 직접적 인상에 의존하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무한하게 변화되는 색채와 윤곽의 세부들은 가시적 세계 로 열려 있는 예민한 눈을 무심코 드러낸다.

 

귀스타브 제프루아는 세잔느의 위대성을 최초로 인정했던 비평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895년에 세잔느에 관해 긴 글을 썼다.

착상이 대단한 복잡한 이 초상화는 석 달 남짓한 기간에 제프루아의 서재에서 그려진 것이다. 세잔느는 이 작품을 완성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완벽한 구성을 성취하고 있다.(그림 2)

▲ (그림 2)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 세잔느. 1895년. 116×89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그림 2)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 세잔느. 1895년. 116×89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얼굴 모습을 보여주는 습작이 아니라 문인의 이미지, 책들에 둘러싸인 문필가의 이미지이다. 세잔느는 흔히 인간 존재들의 특이성을 축소시켜 버린다.

그는 카드놀이꾼들 같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완전히 수동적이거나 내성적이며, 혹은 자신들의 일에 몰두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초상은 거대한 정물이 된다. 대상들의 세계가 인간을 삼켜 버리고 그이 아집의 강도를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 풍요롭고 다양한 환경을 통해 인간을 확 장시키기도 한다.

억압된 그의 활동은 그의 직업 도구가 되는 복잡하게 마디를 이룬 책으로 전가된다. 실제로 그의 등 뒤에 있는 책의 배열은 선반마다 다른 기울기로 들쭉날쭉하다가 아래편의 펼쳐진 책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것은 이 남자보다도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대조적으로 이 남자는 내뻗어 구부린 양팔로 인해 대치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를 둘러싼 의자와 책상은 비스듬한 형태들의 또 다른 복합인데, 이 형태들은 책으로 된 벽과 심원하게 병치되면서 공통된 색조와 놀랍게 조응하는 선에 의해 책들과 통일된다.

책상 위에 놓인 펼쳐진 책들, 서가에 꽂힌 접힌 책들은 모두 제프루아의 머리로 수렴되면서 균형 잡힌 방향들의 공통구조에 속하게 된다.

서가와 책상에 있는 여러 가지 오렌지색의 악센트들 은 수직면과 수평면의 대비를 굳건하게 한다. 가까이 있는 오렌지색의 비스듬한 책과 평행하는 이마 위의 따뜻한 색채의 붓질과 오른쪽 어깨의 비스듬한 밝은 반점을 보면, 세잔느가 얼마나 신중하게 각 부분을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보여진 모든 것을 나름의 활력과 매력을 지닌 일관되게 균형 잡힌 구조 속에 적응시키려고 하는 강력하고 탐색적이며 가혹한 노력을 통해서, 우연히 직접 포착된 공간의 사실적인 광경과 풍부한 세부들을 보기 드물게 통합한 것이다.

전체는 치열하게 연구되었으면서도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때로 인위적으로 구성된 형태들로부터 혼돈의 세계인 복잡한 방으로 향해 가기도 하고, 또 이 후자로부터 화가가 만들어낸 질서로 곧바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동요는 영구하다. 그 어떤 선도 단순히 하나의 구도로 고안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빛 속에서의 존재의 떨림이며, 세잔느의 강건하고 민감한 터치의 소산이다.

가장 곧은 선과 가장 불규칙한 선들이 서로 똑같이 예민하며, 그들 모두가 이미지이자 회화조직이라는 이중적 양상으로써 동등하게 전체의 부분이 된다.

자그만 여인의 조상이 책들의 엄격성을 완화시킨다면, 또한 그것은 그 축과 굽은 팔로써 남자의 경직성에 대응된다. 푸른 꽃병에 꽂힌 튤립은 그의 팔과 같은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리고 섬세하게 그려진 생생한 오른손은 그의 위 멀리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상기 시킨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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