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세잔느의 회화에 깃든 우아한 정적의 효과는 두드러지게 지배적인 수평선들과 적나라한 기하학적 형태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수없이 반복된 수직선들과 미묘하게 가지를 친 선들이 담고 있는 이 그림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엿볼 수 있다.(그림 1)

▲ 자 드 부팡의 밤나무. 세잔느. 1885-1887년 경. 72×90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 (그림 1) 자 드 부팡의 밤나무. 세잔느. 1885-1887년 경. 72×90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그 평온함은 색채와 형태들 간의 보다 미묘한 관계의 결과이다. 착상이 건축적인 것은 비록 대단히 평온하고 이완되어 있긴 하지만, 고전적 건물들보다는 중세의 건물들을 상기시킨다.

세잔느는 여기에서 이슬람 미술의 원리를 재발견했다. 즉 발랄하고 종잡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장식적 선들을 보다 성기고 안정된 형태들 위에 배치하는 것이다. 세잔느는 원근법을 최소한으로 구사하는 시점을 택했기 때문에 깊이의 긴장이 별로 없다.

왼쪽 건물의 측면은 정면의 벽처럼 보인다. 멀리 있는 산꼭대기는 이 풍경의 초점일텐데, 두 열의 나무들을 마치 돌담이나 낮은 지평선처럼 화면과 평행되는, 도림질 세공을 한 막 같은 것으로 본다.

사물의 분리성, 즉 단지 사소한 사선적 운동만으로 깊이감을 나타내는 공간상의 단순한 배열이 지배적인 정적에 첨가된다. 두께, 기울기, 가지, 간격, 조명 등에 있어 미세한 차이를 보여주는 나무줄기들은 독특한 유기적 형태들로서, 견고하면서도 완전한 원기둥 형태의 엄격함과 긴장은 없다.

그림 전체에 그물처럼 퍼져 있으며 마침내 안개 낀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보다 가늘고 가벼운 나뭇가지들에서 그 수직선들의 위로 치솟는 힘은 점차적으로 흩어져 버린다. 우아하게 뻗은 가지의 형태들은 지루하게 반복되지 않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것들은 더 두꺼운 가지들로부터 은밀하게 뻗어 나와 건물과 작은 나무들에 그려진 윤곽선과 합쳐진다. 이것들의 사선적인 움직임들은 고요한 산봉우리의 비탈진 경사면과도 평행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 수평적 요소들이 너무 적고, 보다 강력한 수직적 형태들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 하더라도 수평선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림의 아랫부분에는 녹색의 넓은 띠가 있는데, 이것은 수직의 나무들에 쓰인 회색빛, 보라색 및 갈색과 대비되는 많은 색조로써 미묘하게 채색된 풀밭이다. 이 색채대비는 떠받치는 형태와 받쳐지는 형태 사이의 대비를 보강하며, 지면과 나무에 쓰인 붓질의 차이를 통해서도 더욱 두드러진다.

뒤편에는 노란색과 연두색의 수평적 띠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그것에 이어 돌담과 집이 있어서 그들이 한데 어울려 나무에서 교대로 나타나는 빛과 그늘의 색조를 반복한다.

다양한 색채와 붓자국으로 형성된 연속적인 때들은 색채와 터치 모두를 점차 밝게 하면서 하반부의 공간 속에 수평선과 수직선의 격자무늬를 만드는데, 이 무늬는 지붕, 언덕 그리고 멀리 산봉우리 등에 있는 경사진 형태를 통해 점차 위쪽의 사선적 망상조직으로 변해 간다.

 

스케치한 듯 엷게 채색된 이 그림에서는 모티브와 지적인 접근방식이 괄목할 만하다.(그림 2)

▲ (그림 2) 마린 성. 세잔느. 1888~1890년. 75×92cm. 탄하우저 컬렉션
▲ (그림 2) 마린 성. 세잔느. 1888~1890년. 75×92cm. 탄하우저 컬렉션

여기서 세잔느는 상상으로 처리한 원근법을 통해 사물들의 크기를 구성적이고 표현적인 착상에 자유롭게 맞추어 원근법적 현상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깊이와 화면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는 원근법적 현상을 역설적으로 구사한다.

다른 작품들에서 그가 멀리 있는 대상들을 정상적인 외양보다 크게 그린 것과 똑같이, 이 그림에서 그는 아주 가까운 대상을 아주 멀리 있는 듯이 여겨지도록 작게 그려 놓았다.

여기서는 건물 전체를 중앙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 옆으로 확장되어 있으며, 가시영역 언저리에 있는 건물들의 보다 큰 단편들과 비교된다. 색채가 가장 강렬한 부분은 양쪽 가장자리의 건물들에 첨가된 예외적으로 밝은 두 개의 주홍색 점이다.

다른 집들에 비해 대단히 작은 중앙의 집은 마치 그림 속의 그림, 즉 몽타주처럼 다른 원근법에 속하는 듯이 보인다. 이 야릇한 시각 게임 속에서 중앙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원근법에 의해 축소된 것은 정서적으로도 거리가 멀다. 양 옆의 건물들만 직접 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상 뚜렷이 작아 보이는 이 건물은 큰 건물들의 종합이다. 그 수직의 탑과 수평의 양 날개는 다른 건물들에 분리되어 있는 수직적, 수평적 지배요소들을 통합한다. 이는 인상주의자들이 확대된 대상을 그림의 가장자리에 놓고 그것을 화폭의 틀로 잘라내던 수법을 떠올린다.

역설적 시각과 공간 처리에는 마찬가지로 중요한 측면이 또 하나 있다.

아주 상이한 성질을 가지며 깊이가 구별되는 평면들 속에 있는 세 건물은 그것들 사이에서 한 덩어리로 엉켜 있는 나무들을 통해 결합된다.

두드러지게 기울어진 오른쪽 건물의 윤곽선은 한 나무(멀리 지평선 위에 있는 나무)의 가장자리로 연장되는데, 이 나무는 이 수법에 의해 전경 즉 아래의 노란 길과 연결된다. 이 나무는 전경의 줄기들로부터 솟아난 나무들과 왼편에서 합체되면서 중앙 건물 위쪽 뒤편의 형태 없는 부분에 속하게 된다.

만약 세잔느가 이 그림을 완성했더라면 이 나무들은 분명 그 색에 있어서 보다 멀리 있는 나무들과 더욱 날카롭게 구별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윤곽선들과 평행선들을 통하여,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생각은 유지되었을 것이다.

시각적인 것의 이러한 역설은 결국 조화로운 회화적 효과와 이미지의 매력에 의해 정당화되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시각에 있어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환기시키는 느낌과 일치한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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