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고갱이 타이티 섬으로 떠나기 전 그의 브리타뉴 시대에 남긴 걸작 중 하나이다. 대각선으로 그려진 나무둥치와 하향식 원근법은 강한 윤곽선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일본 목판화를 연상시킨다. 고갱은 고흐에게 “이 인물들에서 나는 소박하면서도 미신적인 단순성을 찾았네. 완벽 한 순수함이 깃들어 있네.”라고 밝히고 있다.이 그림은 형식을 통해 관념을 표현하는 상징주의의 본보기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설교 후의 상상도」에서는 먼 옛날의 가공의 설화와 당시의 현실의 세계를 한 작품 속에 넣어서 만든다는 대담하고도 정력적인 작업을 감
1880년대 후반부터 고갱은 자신의 작품에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굵은 윤곽선으로 정리하는 의미의 ‘종합’이라는 말을 부여했다.이는 기법과 내용 양쪽 면에 모두 적용되는데, 기법 면에서는 종래 인상주의의 세세한 붓놀림에 의한 분석적 기법에 대응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의 그림처럼 색과 형태를 단순화시킴으로써 간결하고 뚜렷하게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용 면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한 화면에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빛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불명확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고갱은 대상 하나 하나를 명확한 존재로 표현하고자 했다.이
이 작품은 1888년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아를(Arles)에 정착한 고호가 그곳 아를의 한 카페의 밤 품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아를시기의 고호의 그림은 남부의 강렬한 햇살 아래 그의 그림은 밝은 색상으로 빛나고 강렬한 터치로 변화되어 진다.특히 이 시기는 그의 독자적 양식을 확립 하는 시기로 작품의 양뿐만 아니라 질적 변 화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색채 그의 작품에 가장 본질적인 관심사로서, 폭발할 듯한 강렬한 색채는 그의 정열적이며 순수했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색의 대비로 표현한
이 작품은 죽기 전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오베르 지역의 들판을 그린 그림이다. 1890년 5월 생 레미 병원에서 퇴원하여 북쪽 오베르로 거처를 옮긴 고흐는 두 달간의 생활을 끝으로 1890년 7월 29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찬란한 노랑과 파랑의 아름다운 색채가 대비된 화면은 격정적인 필치에 의해 오히려 그가 겪었을 정신적 괴로움을 강렬하게 전하는 듯하다. 죽기 이틀 전에 이 작품을 제작해 다른 어떤 그림보다도 그 의미를 더해주는 작품이다. 건강과 힘을 주는 시골 들판의 모습은 그가 생의 마지막으로 삼았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고흐는 1885년부터 그가 자살한 1890년까지 37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은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던 고흐의 궁핍한 형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화상이 고흐 자 신을 확인하는 특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한결같은 포즈로 거울을 응시한 채 그려진 고흐의 자화상들은 그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였음을 보여 준다.특별히 이 작품은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결별된 후 귀를 자르고 난 이후 제작된 두 점의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귀에 붕대를 감은 또 하나의 자화상은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한 그림으로 청색 계열로
이 작품은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낀 고호가 188년 2월 아를로 이주한 후에 기거한 방을 묘사한 그림으로 고갱과의 공동생활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고 있다.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로 만들고 싶어 했던 고흐는 노란 집에서 고갱을 설득해 함께 지내게 된다. 고흐는 고갱과의 관계에 커다란 기대를 품었지만 오래지 않아 불화가 생겼고, 1888년 크 리스마스 이틀 전 고갱과의 언쟁 끝에 발작을 일으켜 스스로 한쪽 귀를 잘라내 버린다. 그 후 생레미 요양소에 자진해서 입원했던 그는 아를의 아틀리에 시절을 잊지 못한다.이 그림은 화가 스스
네덜란드 태생의 후기인상파 작가인 빈센트 반 고흐는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통한 정서적인 감화를 전하는 자신만의 작품을 확립함으로써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생동안 정신적 질환과 가난으로 고통을 겪으며,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불운의 작가로, 살아 있는 동안 무명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강렬한 표현주의적 에너지는 오늘날까지 감동을 전하고 있으며, 특히 표현주의 미술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파리에서 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며 시작한 그의 화풍은
자연의 모든 물체는 '구와 원통, 원주'라는 형태로 단순화된다고 믿었던 세간은 자 연의 본질적 형태와 공간의 깊이감을 2차원의 화면 위에 잡아내기 위하여 색채와 태를 재구성하였다. 예를 들어 작품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머리는 구이고 모자와 팔뚝, 몸통, 다리는 원통이었다.하지만 회화의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을 동시에 한함 던 그는 입체감을 위해 색을 포기하거나, 빛나는 색채를 위해 단단한 형태를 포기하고, 작가 자신의 자의적인 명암 조작을 통해 형태의 본질적인 모습과 화면 공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회화 평면 위에 대상의 형태와
후기인상파의 이단아로 평가되는 고흐는 중량감을 주는 두텁고 거친 터치로 움직임과 속도감이 느껴지게 표현함으로써 인물이나 풍경 안에 자신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내면세계의 불안정성이 반영된 것으로 인간의 고독이 투영된 내면적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애초 인상파의 밝은 색채의 영향을 받아들였던 고흐는 동시에 인상파가 지닌 공허하고 감각적인 외면의 표현에 머무른다는 점에 불만족하였다. 따라서 고흐는 인상파의 밝은 색채와 형태를 더욱 과장하고, 강렬한 색과 짧고 격렬한 터치를 사용함으로써 내면의 감정과 감동을 극적으로
후기인상파 미술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인상파의 빛에 대한 맹목성과 신인상파의 과학적 표현에 반발하여 작가적 주관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특징을 전개한 새로운 미술사조이다. 고흐, 고갱, 세잔을 대표작가로 하는 후기인상파 미술은 인상파의 밝은 색채를 계승하는 한편 각기 작가적 주관에서 비롯된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상주의의 단순한 표피적 시각효과라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후기인상파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인상파의 빛에 대한 집착과 신인상파의 과학주의적 표현이 지닌 한계를 인식하고,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우리는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에서 점점 더 많은 중요성을 띠게 되는 새로운 이념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를테면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당시의 사람들
19세기 초반 프랑스 미술계는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크루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전에 프랑스 아카데미는 소재 선택에서 고전주의적 접근을 선호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미술 소재를 고전이나 신화뿐만 아니라 바이런 등의 문학 작품에서도 찾으려고 했다.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이상적인 미술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자연적인 표현을 추구했다. 쿠르베는 "오직 사실주의만이 민주적이고, 화가의 가장 훌륭한 모델은 농민과 노동자다."라고 말했다. 마네의 특별한 화법은 스페인 미술과 인상주의 기법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 폴 세잔이 성장한 환경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루이 오귀스트 세잔과 앤 엘리자베스 오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두 여동생과 유복하게 자랐다.열세 살 때 부르봉 중학교에 들어간 세잔은 그곳에서 에밀 졸라, 장 밥티스트 바유를 만나 친구가 됐다. 이후 세잔은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 대학에 입학했다.세잔은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로 가서 화가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1861년 에밀 졸라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러나 세잔은 파리의 생활에 적
역사가들은 1500년대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르네상스 전성기는 약 1500년 경부터 시작됐다. 이 때는 유럽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시기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또는 부활)'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인 이상으로 되돌아가자는 뜻이다.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은 점점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전통적인 종교 연합이 무너지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무자비하게 새로운 땅을 침입했다. 유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는 1922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로 프로이트 일가는 1933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프로이트는 데덤의 이스트 앵글리안 회화 & 드로잉학교에서 세드릭 모리스와 함께 마술을 공부했으며 그 뒤 골드스미스 대학교로 진학했다.그의 초기작은 독일 사실주의, 특히 오토 딕스나 크리스티안 샤드 같은 ‘노이에 자할리히카이트 ≪Neue Sachlichkeit(신즉물주의파)≫의 영향을 받았다. 좀 더 최근 작품은 사실주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그 방법은 훨씬 더 관
기간 : 4월 23일까지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층 1 전시실『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은 삼성그룹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게 2021년 4월 기증받은 1,488점 중 이중섭의 작품 90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중섭 기소장품 10점을 모아 100여 점으로 구성한 전시이다.이번 전시는 이건희컬렉션을 중심으로 한 두 번째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양질의 한국미술을 소개하고, 대중에게 희소가치가 높은 작품의 관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이중섭(1916~1956)은 힘들고 어려웠던 삶 속에서도 그림
‘앤디 워홀은 활동 기간 내내 ‘자화상’이라는 주제로 되돌아오곤 했다. 1964년 그는 일련의 소형 실크 스크린 자화상 연작을 선보였다. 유색 바탕의 이 작품들은 2개, 혹은 4개씩 세트로 묶어서 감상 하게끔 기획되었다.3년 후인 1967년, 그는 합성 폴리머 바탕 위에 상업용 에나멜페인트를 칠한 대형 자화상들을 내놓았다. 워홀은 1978년에도 다시금 자화상을 제작했는데, 이번에는 목이 졸려 질식해가고 있는 등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보기에도 불편한 연작이었다.1978년, 1979년, 그리고 19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60년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아이티와 푸에르토리코인 부모의 혼혈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 음악, 드로잉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영재들을 위한 실험학교인 시티-애즈-스쿨에 다니면서 어린 그라피티 예술가 알 디아즈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SAMO Same Old Shir라는 그라피티 캐릭터를 창조했다. SAMO는 이후 수년간 뉴욕의 놀이터와 폐허가 된 건물, 그리고 빈민가의 아파트 벽을 자극적인 정치적 슬로건으로 뒤덮었다.바스키아는 1978년 디아즈와 결별
장소 : 충무아트센터 대극장기간 : 3월 24일 ~ 6월 25일시간 : 160분(인터미션 20분 포함)가격 : VIP석 150,000원 R석130,000원 S석100,000원 A석 70,000원 2004년 한국 초연 이후 19년간 공연! 서울을 포함 33개 지역에서 1,791회 공연, 2,099,893 관객이 선택!대한민국이 사랑한 뮤지컬
페르 키커비(Per Kirkcby)는 1938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1957년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해 자연사를 공부했고 지질학을 전공했으며 1964년에 졸업했다. 1958년부터 1972년까지 지질학자로 그린란드를 오가며 일했다. 1962년에는 코펜하겐의 실험 예술 학교에 등록해 회화와 행위예술을 배웠다. 이후 한동안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64년 코펜하겐에서 첫 번째 행위 예술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립 회화 학교(슈테넬슬레)에서 순수미술 교수로 지내다가 2018년 코펜하겐에서 79세의 일기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