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시대'는 여인과의 사랑으로 그림에 불안함이 느껴지지만 한층 밝아진 분위기가 나타나는 시기로 초기인 ‘청색시대’를 거친 후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여 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색과 분홍색을 많이 사용했다.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즉, 이 시기는 파리에 완전
후기 입체파인 1912년 입체파는 분석에 의해 획득된 추상적 구조와 실제의 형태를 결합하여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 냄으로써 종합적 입체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는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 속에 분석적 입체주의를 절충시킨 것이며 여기서 기존의 작은 분석적인 면들은 사라지고 보다 큰 기하학적 형태를 구축하게 된다. 이것은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해체된 면으로만 대상을 파악함으로써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위기를 인식함에 따른 것이다.이에 따라 종합적 입체파에서는 분석적 입체파 후기에 시도되었던
입체파 미술 (Cubism)입체파 미술은 20세기 초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를 중심으로 전개된 혁신적 예술운동으로,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의 기하학적 이론의 영향 아래 환원적 형태와 복수시점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던 미술사조이다. 이들은 당시 인상파와 야수파의 작품이 너무 감각적 색채에만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고, 미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통해 사물의 형태가 지닌 입체적 리얼리티 표현에 도달하고자 하였다.최초 브라크의 작품 「에스타크의 집」에 대해 ‘입체(Cube)’라는 조롱조의 별칭으로 시작된 입체
에밀 놀데 (Emil Nolde, 1867~1956)에밀 놀데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를 대표하는 화가로 판화와 수채화를 포함하여 격정적인 종교화와 불길한 분위기를 담은 풍경화로 유명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 는 젊은 시절 목각사(木刻師)로 일하며 생활했다.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던 때는 그 초기작품 중 몇 점이 엽서로 제작되어 팔렸을 때 뿐이었다. 파리에서 표현주의 화풍과 유사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그는 1906년 ‘다리파’에서 약 1년간을 보냈으나, 지나친 결속을 강조한 그룹의 통제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인 표현주의
이 두 사람은 독일 출신이 아닌 오스트리아 화가들로 빈의 도시적 성격과 퇴폐주의를 옹호하 는 분위기에 반하여 표현주의 활 동에 가담한 작가들이다.클림트의 제자였던 에곤 쉴레는 점차 아르누보의 화려한 장식성과는 또 다른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정신적 고독과 욕망,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불안과 혼란, 강박적인 성에 대한 집착 등을 뒤섞어 표현하였던 그는 수많은 유화, 수채화, 드로잉을 쏟아냈다.매우 빠르게 그려진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완전히 적나라한 노출로 욕망과 성과 그로 인한 고통 받는 인간상을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초기 분리파 운동에 참여했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빈분리파’ 운동의 정점에서 상징주의적 표현주의 회화를 이끌었던 화가이다. 특유의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으로 매혹적인 장식적 작품이 특징적인 클림트는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전환기 시기의 대표적인 모더니즘의 선구로 평가된다.극빈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클림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일찍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이 시작됐다. 특히 서른 살이 될 무렵부터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 주면서 강렬한 표현주의 화가
사춘기상징주의적으로 표현주의를 실현한 뭉크는 그림을 통해 여러 의미들을 상징적으로 통일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 주었다.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성(性)에 눈 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고 있다.마치 첫 월경을 맞은 소녀의 두려움, 불안을 경험한 모습으로, 혹은 이제 막 눈을 떠가는 성 의식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습이다. 소녀의 모습은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한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내면을 감
청기사파'청기사파'는 '다리파'와 함께 20세기 초에 활약한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유파로서, 1911년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전개된 화파이다.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색채의 강조와 형태의 과장을 강조한 '청기사파'는 1909년 뮌헨에서 결성된 '신예술가동맹'에서 분열 발전하여 1911년 말 뮌헨에서 제1회전을 개최하면서 탄생하였다. 청기사파의 첫 전시회는 191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뮌헨의 탄호이저 현대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이 전시회에 참가한 다른 미술가로는 앙드레 드랭, 장 아르프,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
표현주의미술은 현대 표현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와 함께, 상징주의 화가인 클림트, 에곤 쉴레 등의 분리파 작가들과 '다리파'와 '청기사파'를 중심으로 한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로 묶이는 다음의 세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첫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분리파 그룹을 살펴볼 수 있다. '분리파' 그룹은 처음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에 의해 만들어진 '슈투름 그룹'으로 시작하였으며, 1897년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빈 분리파'로 탄생하게 됐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주로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미술에 반발한 현대미술운동으로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특징으로 한 주관적 표현에 중점을 두는 미술사조이다. 표현주의 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이래 이루어진 변형된 형태와 색 그리고 재구성된 화면 등의 다양한 양식의 미술에 모두 적용될 수 있으나 좁은 의미에서 20세기 초 ‘다리파', '청기사파' 등의 독일 표현주의를 중심으로 한 미술로 한정되는 대상의 표현 묘사보다는 작가의 주관적인 내면의 의지나 감정을 약동하는 선과 형태의 변형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이 외 현대
파리 출생의 프랑스 화가인 앙드레 드랭은 1905년 마티스와 함께 살롱 도론에 참여하며 가장 대담한 야수파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초기 블라맹크와 같은 작업실에서 지냈던 드랭은 마티스의 화풍에 매료되었으며 이후 마티스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이들과 함께 화가의 길을 함께 하게 된다.드랭의 초기 야수파 시기 는 강렬하고 경쾌한 원색적 표현이 두드러지고 있으나 몇 년 후부터 이 지적인 그의 개성이 반영되기 시작하여 마티스에 비해 어둡고 가라앉은 색채를 선호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초기 고갱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화면을
마티스와 함께 대표적인 야수파 화가였던 블라맹크는 가장 야수파적인 정열의 화가로 평가된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방법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예술적인 진 글이 아니라 본능적인 인간적인 진실을...” 추구하고자 함으로써 본질적인 야수적 표현을 갈망했던 작가이다. 자유방임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블라맹크는 12세부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으나,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기계공 등으로 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갔다.그 과정에서 고흐의 작품 속 정열적인 에너지에 깊은 감명을 받아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모자를 쓴 여인 (Woman in a Hat)색채의 마술사 마티스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위대한 어떤 것’이거나 ‘우리에게 교훈과 가르침을 주는 것이기 이전에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따라서 마티스는 ‘보기에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가 자신의 그림이라고 밝히면서 좋은 그림은 일단 보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 초상화 역시 인물의 실제 색을 소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색채 자체에서 비롯한 충만한 표현을 통해 마티스는 색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포즈를 취
매우 단순하면서도 활기있는 인물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모스크바에 있는 대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리듬감 있는 인물들 간을 이어주는 선묘의 흐름은 작품 속 강렬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찬 몸짓의 춤사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같은 선묘의 움직임은 누드로 나타낸 인간의 외면 너머에 자리 잡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담아내고 있다.이와 함께 넓게 채색된 원색의 색면은 인물의 장엄한 의식에 조화된 자연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인간과 우주의 색을 담아낸다. 즉, 인물의 형태를 이어주는
야수파 미술의 특징20세기 초 최초의 예술적 혁명으로 인간의 원초성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된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과 자율성 획득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애초 고흐와 고갱의 강렬한 주관과 감동, 세잔의 단순성과 고갱의 대담하고 화려한 원색에서 비롯된 야수파 작가들의 야수와 같은 강렬한 색채 추구는 자연스럽게 자연의 재현을 위한 전통적인 색채의 기능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색채 자체의 해방과 색채 표현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강렬한 색채와 함께 전통적 명암과 원근감에서 자유로워진 이들의 화면은 두드러짐도 명암도 없는 평
전환기 미술은 19세기 말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반인상주의를 표방하는 운동의 총칭으로 프랑스 중심의 야수파와 입체파,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 미술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20세기 초 고흐, 고갱, 세잔 등을 숭배하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져 각기 독자적인 유파를 형성하며 그들의 예술을 발전시키고 있다.이러한 새로운 미술의 공통점은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과거 미술과 단절하고 형태와 색채, 그리고 화면 공간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즉,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하고 왜곡된 형태를 통해 색채와 형태의
사과와 오렌지 (Pommes et Oranges)화려한 아름다움과 모던함이 잘 조화된 이 작품은 세잔이 그 린 1890년대 정물화 중 가장 중 요한 것이다.개개의 과일들은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것처럼 왜곡되어 있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 위치 관계도 어딘지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세잔은 완전한 접시의 형태를 위해 시점을 위로 이동한다. 완벽한 형태를 위해 세잔은 현실보다는 화면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여기서 ‘화면의 원리’라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대미술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근본적으로 매우 독자적
생트빅투아르 산 (Mont Saint-Victoire)1882년 이후 고향인 엑상프로방스 근처로 낙향하였던 세간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회화적 문제를 실험하며 작품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생트 빅투아르 산이 지닌 입체적 공간과 깊이감은 자신의 회화적 테마인 전통적 원근법과 입체적 표현의 자유로운 실험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효과적인 대상이었다.원숙기를 넘어서며 제작된 이 작품은 색채가 칠해지지 않는 부분이 많아진다. 그러나 작품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그 여백의 부분이 훌륭한 표현력으로 작용하고 있어, 어떤 의미로는 색채
세잔만이 가능했던 붉은 조끼입은 소년은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이었던 세잔 특유의 양식으로 그려졌다.이 작품은 인상주의에 강렬한 고전주의적 주지주의가 혼합되어 완성된 그림이다. 세잔은 붉은 조끼를 입은 이 모델의 초상을 적어도 4번 이상 그렸는데, 이 작품의 특징은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있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의 형태를 왜곡하는가 하면 여러 시점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 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소년의 오른쪽 어깨가 유난히 길게 표현된 것은 위에서 비
우리는 어디서 와서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at Are We Going?)이 대작은 그의 철학 및 세계관, 인생관등을 생생하게 나타내 주는 회고적 작품으로 늙음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브리타뉴 시기와 타히티 섬 시기의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 등의 특징 속에서 볼 수 있듯이, 고정 회화의 상징성의 체계적 의미를 망라해 보여 준다. 즉, 인물들의 표현은 종합적 상징성과 원시적 상징성을 함께 내포하면서 회화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상징체